[생물정보학자의 취업 성공기] 미국에서 포스닥에 대해서
석사 학위를 할 때도 그랬지만 늘 앞날이 걱정이었다. 당연히 박사를 해야 한다 생각해서 박사를 진학하고 3년 후, 이제는 졸업을 하라는 교수님의 말씀에 따라서 졸업을 하게 되었다. 아직 배울 것도 많았고 할 것도 많았기에 사실 조금은 먹먹했다. 앞으로는 어쩌지라는 생각과 함께 박사를 했으면 당연히 교수를 목표로 포스닥을 가야겠다고 무의식 중에 마음을 먹었던 것 같다. 나의 첫 포스닥의 자리는 지도교수님께서 아시는 교수님을 통해 독일에 있는 의대로 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내가 맡은 업무는 바이오인포매틱스적인 분석이 필요하다고 하였었고, 나는 그 랩의 필요성에 부합하다고 생각하여 독일로의 포스닥을 가는 것에 어려움 없이 결정하였다. 그런데 막상 독일에 있는 랩에 가보니 바이오인포매틱스적인 연구보다는 줄기세포의 데이터베이스 구축이 중점적이어서 내가 생각하고 하고 싶었던 연구주제와는 거리가 있었다. 그렇게 백앤드 개발자와 데이터베이스 구축을 하면서 틈틈이 내가 할 수 있는 연구들을 계획하며 진행하였으나 결국 독일에서 1년을 보낸 후 다시 한국으로 귀국하게 되었다. 그렇게 한 번의 실패를 겪고 나서 생각보다 내가 너무 안일하게 포스닥 생활을 했음을 깨달았고 이번에는 제대로 내가 원하는 연구를 하는 랩으로 가서 연구를 하겠다는 목표가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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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로 여전히 교직의 꿈을 버리지 못하여서 브릭과 nature career, science career, 그리고 관심 가는 랩의 홈페이지를 통해서 컨택을 하였다. 이때는 정말 수단과 방법을 가지리 않고 포스닥 자리를 찾아봤던 것 같다. Bioinformatics가 유망하다고 하지만 Bioinformatics를 한 사람을 뽑으려는 랩은 이미 높은 커트라인을 가지고 있었다. 대표적으로 실험과 생물정보학을 모두 할 수 있는 사람을 뽑는다거나, 개발자 수준의 컴퓨테이션널 한 능력을 요구하는 경우였다. 이러한 경우는 Skype를 통한 면접에서 그럼 넌 박사과정 동안 무엇을 했느냐 라는 느낌을 많이 받았었다. 이때에는 나의 부족함을 많이 느꼈으며 무엇을 내가 더 준비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도 좋은 경험이라 생각하면서 낮에는 계속 메일로 관심 가는 랩에 컨택을 하였고, 운이 좋게 면접이 잡힌 날에는 시차 때문에 밤에 면접을 보게 되었다. 그러는 와중에 드디어 미국의 한 랩에서 같이 일해보자는 연락이 왔고 다시 한번 포스닥을 통한 교직의 꿈에 다시 한번 도전할 수 있다는 안도감과 뭔가를 이루었다는 기쁨에 미국으로 포스닥을 다시 나가게 되었다.
다시 나온 포스닥은 기대와 설렘 반 걱정 반이었다. 저번처럼 실패하지 말아야지 라는 생각과 내가 여기서 얼마만 한 실적을 채워야 살아남을 수 있을지 잠 못 이루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렇게 시작한 미국 생활도 쉽지는 않았던 것은 내가 있던 랩이 중국인이 대부분이 어서 이미 자기네 들끼리 유대감 있는 생활을 하고 있어 랩 생활에서 외톨이라는 느낌을 많이 느꼈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도 열심히 노력했으며, 아무런 도움 및 데이터에 대한 논의도 없이 마우스 모델의 멀티오믹스 분석을 하라고 하여 연구를 진행하던 중 중국인 포스닥들의 비협조 속에서 고생하던 중, PI로부터 나는 자기네 랩과 fit 하지 않아 앞으로 함께 할 수 없겠다라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이때는 나도 부단히 공부하고 연구하며 노력하였는데 나의 노력들이 한순간 날아가는 기분을 느꼈고, 포스닥을 관리하는 교수님과의 미팅을 통해서 다른 랩으로 스위치를 하게 되었다. 이때는 정말 2달 안에 새로운 랩으로 스위치를 하거나 한국으로 귀국해야 한다는 절박함과 내가 이루고자 하는 연구를 하고 싶다는 마음들이 복합적으로 나를 압박해 왔었다. 그렇게 남은 2달 동안 미국에서 알게 된 다른 박사님들과 커뮤니티들을 통해서 다시 한번 포스닥으로서의 기회를 가져보고 싶었다. 이때 가장 많이 들었던 생각은 “난 아직 이룬 것이 하나도 없다”라는 것과 “지금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은 정말 치욕스럽다”는 것이 였다. 그래서 더 부단히 면접준비와 CV 준비를 하였고 수많은 학교의 랩들을 방문하면서 면접을 보았다. 이러한 노력을 보상받듯이 내가 기존에 했던 연구과는 조금 거리가 있지만 새로이 배워보고 싶었던 epidemiology를 하는 디파트먼트로 랩 스위치를 하게 되었다. 이곳에서는 전의 랩과는 비교되도록 연구를 위해 필요한 자원에 대해서 아낌없이 지원해 주었으며 마이크로 매니징 하지 않고 편하게 같은 위치에서 있는 연구자로서 사람을 대해주며 공동의 목표인 좋은 저널에 논문을 출판하기 위해 많이 노력할 수 있는 분위기였다. 다행히 긴장하던 것을 높지 않고 나도 최선을 다해서 연구하며 논문을 쓰게 되었고 약 3년 반 동안 2편의 1저자 논문과 2편의 공동 1저자 논문 그리고 다수의 공동저자 논문을 가지게 되었다. 이 과정 동안 미국심혈관질환학회와 미국당뇨학회에 참가하면서 moderate poster를 수차례 수상하였으며 oral presentation의 기회를 얻을 수가 있었으며, 랩에서 속해 있던 코호트 연구 컨소시엄에서 포스터를 발표할 기회 등을 얻었다. 이러한 대형 학회의 참석과 발표를 통해서 미국당뇨학회에서 큰 상을 수상하였으며, 콘소시업에서 트래블 어워드도 수상하였다. 이러한 기회 속에서 조금씩 자신감이 붙으면서 코호트를 통해 알게 된 다른 연구자들과 다양한 네트워크를 형성하였고 조금 더 진취적으로 연구를 하게 되었으며, 이 당시에는 한국의 교직뿐만 아니라 미국의 교직도 생각할 만큼 많은 것들을 이루었었다고 생각한다.
이와 같은 진취적으로 연구를 하고 있던 와중에 전 세계적으로 코로나가 발병하면서 재택근무를 하게 되었고 코로나 이전과 다른 쉽지 않은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코로나가 더 심해지면서 마침 연장해야 할 J비자의 연장이 불가능 해지고 지도교수가 아낌없이 지원해주려 했던 H 비자로 변경도 불가능 해지면서 복합적인 이유로 한국으로의 귀국을 결심하게 되었다. 이때 여전히 교직에 대한 꿈을 버리지 않았고 나에겐 이미 좋은 논문 4편과 다수의 공저자 논문이 있었으며, 약 5년에 걸친 포스닥 경험이 있어 교직으로의 지원이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고, 드디어 힘들었던 포스닥 과정을 청산하고 나도 한 명의 연구자이자 교육자로써 생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이것은 너무나 성급한 나의 착오였음을 한국에 들어와서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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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C(ibric.org) Bio통신원(자하(필명)) 등록일2024.04.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