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포로산행기

[산포로기행 이한성 교수님과 함께 하는 이야기가 있는 길, 전북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 미륵사지~왕궁리유적~석조여래입상~제석사지~쌍릉]

산포로 2019. 6. 9. 16:30

[산포로기행 이한성 교수님과 함께 하는 이야기가 있는 길, 전북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 미륵사지~국립익산박물관~왕궁리유적~석조여래입상~제석사지~쌍릉~전북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19년 6월 7일


* 구간 : 전북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 미륵사지~국립익산박물관~왕궁리유적~석조여래입상~제석사지~쌍릉~전북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
* 일시 : 2019년 6월 7일(금)
* 모임장소 및 시각 : 서울시 은평구 불광동 연신내역 1번 출구
* 날 씨 : 비온후 개임(최고 영상 26도 최저 영상 16도)
* 동반자 : 동국대 이한성 교수님, 소우 선생님
* 답사지 도착시각 : 전북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 미륵사지 오전 12시
* 답사후 하산시각 : 전북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 미륵사지 오후 6시
* 답사시간 : 약 6시간(식사 및 사진촬영시간 포함)

 

 

 

 

 

오랜동안 공사 후 새로운 모습으로 개방되어 무척이나 찾고 싶었던 전북 익산시 미륵사지를 동국대 이한성 교수님, 소우 선생님과 함께 답사합니다.

 

더욱이나 가물었던 대지를 적셔주는 반가운 봄비도 촉촉하게 내려 답사길에 몸과 마음을 풍성하게 합니다.

 

먼저 답사에 도움이 되는 문화일보의 기사를 일부 살펴 봅니다.

 

- 最古·最大 미륵사지석탑, 해체·보수 20년 작업 완료

 

 치석 제거기 사용… 해체만 10년
 수천여개 돌 조각 하나하나 기록

 

 내달 중순까지 현장 일반 공개
 완전한 모습 12월에 드러낼 듯

 

국내 최고(最古), 최대(最大) 석탑으로 꼽히는 익산 미륵사지 석탑(국보 제11호)이 20년에 걸친 해체·보수 공사를 마치고 당당하고 웅장한 모습을 드러냈다. 문화재청(청장 김종진) 국립문화재연구소는 20일 익산 미륵사지 현장에서 지난 20년간의 작업 끝에 최근 수리를 마친 미륵사지 석탑의 모습과 조사연구 성과를 공개했다.

 

미륵사지 석탑은 지난해 12월 원래 남아있었던 6층까지 수리를 완료하였으며, 오는 7월 중순까지 현장을 일반에 공개할 예정이다.

 

익산 미륵사는 7세기 백제 후기에 중흥기를 이끈 무왕(재위 600∼641) 대에 창건되어 조선 시대까지 유지됐던 사찰로서 1980년부터 1994년까지 진행된 발굴조사를 통해 전체적인 규모와 가람배치의 특징 등이 밝혀졌다. 미륵사지 석탑은 원래 미륵사에 있었던 3개의 탑 중 서쪽 영역에 위치한 석탑으로서 현존하는 석탑 중 최대 규모이며, 백제 목조건축의 기법이 반영된 독특한 양식의 석탑이다.

 

조선 시대 이후 석탑은 반파된 상태로 6층 일부까지만 남아있었는데 일제강점기인 1915년 시멘트를 마구잡이로 부어 보수해 흉물스럽게 변했다. 우리 국민이 자주 찾는 문화재지만, 시멘트로 발라진 모습 탓에 원형 복원 문제가 오랫동안 숙제로 제기돼 왔다.

 

문화재위원회는 1999년 해체·보수를 결정했다. 이어 2000년 정밀조사와 가설 덧집 설치를 거쳐 2001년 10월 국립문화재연구소는 전라북도와 협약을 체결하고 석탑의 본격적인 해체조사와 함께 다양한 분야의 학술·기술 조사연구, 구조보강, 보존처리 등을 시행했다.

 

문화재청에 따르면 해체에만 10년이 걸렸다. 수천여 개의 돌 조각을 하나씩 걷어내고, 크기와 생김새를 기록했다. 또 시멘트는 치석 제거용 기계로 떼어 냈다. 보수 작업은 축조 당시 재료를 최대한 활용했으며 옛 돌과 새 재료는 티타늄 봉으로 접합하고, 돌 사이 빈틈은 무기질 재료로 메꿨다. 원래 유실돼 시멘트로 덮은 부분은 돌을 쌓아 올렸다.

 

2009년 1월 석탑 해체조사 과정 중 1층 내부의 첫 번째 심주석에서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가 발견돼 학계, 불교계 등 국민적 관심이 집중되기도 했다. 이를 통해 석탑의 건립 시기(639년), 미륵사 창건의 배경과 발원자 등이 밝혀졌으며, 이후 수습한 유물들이 학술조사와 보존처리 과정을 거쳐 최근 보물로 지정예고됐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미륵사지 석탑 보수정비는 단일 문화재로는 최장기간 체계적인 수리를 진행한 사례이고, 특히 국제적 기준에 따라 학술조사와 해체·수리 과정을 충실히 이행했다는 점에서 석조문화재 수리의 선도적 사례”라며 “원래의 부재(部材·건축 재료)를 최대한 재사용하여 문화재의 진정성을 확보하고 과학적 연구를 통해 구조적 안정성을 확보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크다”고 말했다.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는 ‘미륵사지 석탑 보수정비사업’을 진행하면서 그 과정을 국민에게 계속 공개해왔다. 오는 7월 말부터 시행될 가설시설물 철거와 주변 정비를 위해 잠시 현장의 개방을 중지할 예정이나, 정비를 마치는 12월부터는 미륵사지 석탑의 완전한 모습을 국민에게 공개할 예정이다. 또 그동안의 수리 과정과 결과를 담은 보고서 발간, 기술교육, 학술행사 등을 통해 성과를 지속적으로 공유하게 된다.

 

문화일보 이경택 기자 ktlee@munhwa.com 게재 일자 : 2018년 06월 20일(水)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8062001032527097001

 

“사리봉안기는 왕후 발원문, 유일한 백제 왕비 이야기”
‘미륵사지석탑 사리장엄’ 새로운 사실

 

 

▲  ① 익산 미륵사지석탑 출토 은·동제 원형합(왼쪽부터)과 금제사리호, 금제사리봉안기. 사진 아래는 각종 구슬들. ② 1층 심주석 사리공 각변 중앙에 선명한 삼국시대 먹줄. ③‘중부덕솔(中部德率)…’ 명문이 새겨진 금제소형판. ④ 2002년 해체조사에 들어가기 직전 미륵사지석탑의 모습. ⑤ 보자기에 싸여져 함께 부식된 소형 도자(칼). 양 끝에 금제로 투겁을 씌워 마감했으며 특히 1점(아래)은 손잡이인 환두(環頭)에 식물무늬를 투조해 화려하게 장식했다. 국립문화재연구소 제공

 

19일 오후 전북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 미륵사지석탑(국보 제11호) 해체조사 현장에서 공개된 백제 무왕(武王·재위 600∼641년)대 사리장엄(舍利莊嚴)은 충남 공주 무령왕릉 발굴과 부여 능산리절터 백제금동대향로 조사 이래 백제 지역 최대의 고고학적 성과로 평가를 받고 있는 만큼 풀아야 할 숙제도 많이 남겼다.(문화일보 1월19일자 1·9면 참조)

 

사리장엄 또는 사리장엄구는 사리와 사리를 봉안하기 위한 다중 구조의 용기 및 탑내에 들어가는 각종 공양구 일체를 말한다. 이번에 미륵사지석탑 1층 심주(心柱·중심 기둥) 윗면 중앙의 사리공에서 확인된 사리장엄은 앞·뒷면에 193자의 명문이 새겨져 있는 금제사리봉안기와 금제사리호 등 총 505점에 달한다.

 

이중 좌평(佐平·백제 16관등 중 제1품) 사탁(택)적덕(沙(宅) 積德)의 딸인 백제 왕후가 재물을 희사(喜捨)해 가람(伽藍·미륵사)을 세우고 기해년(己亥年·639년)에 사리를 봉안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금제사리봉안기는 무왕의 부인이 된 신라 진평왕의 딸 선화공주가 미륵사 창건의 중심인물임을 말하는 ‘삼국유사’에 실린 설화의 내용을 부인하는 것이어서 역사학계에서 큰 파장을 예고하고 있다.

 

<금제사리봉안기 원문>

(앞면)竊以法王出世隨機赴

 感應物現身如水中月

 是以託生王宮示滅雙

 樹遺形八斛利益三千

 遂使光曜五色行?七

 遍神通變化不可思議

 我百濟王后佐平沙

 積德女種善因於曠劫

 受勝報於今生撫育萬

 民棟梁三寶故能謹捨

 淨財造立伽藍以己亥

(뒷면)年正月卄九日奉迎舍利

 願使世世供養劫劫無

 盡用此善根仰資 大王

 陛下年壽與山岳齊固

 寶曆共天地同久上弘

 正法下化蒼生又願王

 后卽身心同水鏡照法

 界而恒明身若金剛等

 虛空而不滅七世久遠

 ?B蒙福利凡是有心

 俱成佛道

 

<원문 해석>

가만히 생각하건데, 法王(부처님)께서 세상에 나오셔서 (중생들의) 근기(根機)에 따라 감응(感應)하시고, (중생들의) 바람에 맞추어 몸을 드러내심은 물속에 달이 비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석가모니께서는) 왕궁(王宮)에 태어나셔서 사라쌍수 아래에서 열반에 드시면서 8곡(斛)의 사리(舍利)를 남겨 3천 대천세계를 이익되게 하셨다. (그러니) 마침내 오색(五色)으로 빛나는 사리(舍利)를 7번 요잡(?, 오른쪽으로 돌면서 경의를 표함)하면 그 신통변화는 불가사의 할 것이다.

우리 백제 왕후께서는 좌평(佐平) 沙(宅)積德의 따님으로 지극히 오랜 세월[曠劫]에 선인(善因)을 심어 금생에 뛰어난 과보[勝報]를 받아 만민(萬民)을 어루만져 기르시고 불교[三寶]의 동량(棟梁)이 되셨기에 능히 정재(淨財)를 희사하여 가람(伽藍)을 세우시고, 기해년(己亥年) 정월 29일에 사리(舍利)를 받들어 맞이했다.

원하옵나니, 세세토록 공양하고 영원토록 다함이 없어서 이 선근(善根)을 자량(資糧)으로 하여 대왕폐하(大王陛下)의 수명은 산악과 같이 견고하고 치세[寶曆]는 천지와 함께 영구하여, 위로는 정법(正法)을 넓히고 아래로는 창생(蒼生)을 교화하게 하소서.

또 원하옵나니, 왕후(王后)의 신심(身心)은 수경(水鏡)과 같아서 법계(法界)를 비추어 항상 밝히시며, 금강 같은 몸은 허공과 나란히 불멸(不滅)하시어 칠세(七世)의 구원(久遠)까지도 함께 복리(福利)를 입게 하시고, 모든 중생들 함께 불도 이루게 하소서.

(번역 김상현 동국대 교수)

 

당장 ▲서동왕자와 선화공주의 러브 스토리가 후대에 가공된 설화이거나 ▲무왕이 여러 명의 왕후를 뒀을 가능성 ▲40여년 간의 오랜 재위기간으로 볼 때 선화공주가 죽은 뒤 사택적덕의 딸이 왕후가 됐을 것이라는 등 갖가지 추정이 제기되고 있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전설과 같이 선화공주가 미륵사 창건의 중심인물은 아니라는 것이다.

 

한편 금제사리봉안기가 철저하게 왕후가 주체가 된 발원문이라는 사실도 새롭게 확인됐다. 국립문화재연구소의 의뢰를 받아 금제사리봉안기를 판독한 김상현 동국대 사학과 교수는 21일 원문 해석 중 앞면 7행의 ‘우리 백제 왕후께서는(我百濟王后)’는 ‘나 백제왕후는’으로, 뒷면 6∼7행의 ‘또 원하옵나니, 왕후의 심신은(又願王后卽身心)’은 ‘또 원하옵나니, 왕후 내(나) 자신은(又願王后卽身)은 마음이(心)’로 끊어 읽어 주어를 왕후로 보는 것이 제대로 된 해석이라고 밝혔다.

 

이와 같이 해석하면 금제사리봉안기는 사택씨인 왕후가 발원한 것이 명확하게 된다. 김 교수는 또 “앞면 7∼8행 문장은 누가 봐도 ‘나 백제왕후는 사택적덕의 딸로’라고 보는 것이 순리적인 해석”이라며 “백제 관련 국내 기록 중 왕비 이야기가 전무하다는 점에서 거의 유일한 기록”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하지만 김 교수는 “미륵사 창건 설화 중 선화공주 관련 얘기만 빼면 ‘삼국유사’ 내용이 거의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며 ‘삼국유사’의 자료적 가치를 강조했다.

 

최연식 목포대 역사문화학부 교수는 “중국 연호를 일체 안쓰는 백제 금석문의 특징을 이번 금제사리봉안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며 “무왕을 ‘대왕폐하(大王陛下)’로 호칭한 점 등과 함께 중국과 사대관계를 맺고 있는 가운데서도 독자성을 지키려 한 백제의 의도를 읽을 수 있다”고 말했다.

 

금제사리봉안기와 함께 출토된 금을 두드려 펴서 만든 금제소형판 18점 중 일부에서도 시주자 명문이 발견돼 주목을 받았다. 현재 3점에서 명문이 확인되는 데 이중 한 점에는 ‘중부(中部) 덕솔(德率·백제 16관등 중 제4품) 지율(支栗)이 금덩어리 1개를 보시한다(中部德率支栗施金壹枚)’는 내용이, 또 다른 한 점에는 앞·뒷면에 ‘하부(下部)의 비치부(非致夫)와 부모 처자가 함께 보시한다(下? 非致夫及父母妻子 同布施)’라는 내용이 각각 새겨져 있다. 나머지 한 점은 현재 판독불능이다.

 

배병선 국립문화재연구소 건축문화재연구실장은 “마치 목간을 보듯 얇은 금편에 행정구역명과 시주자, 발원내용 등을 새겨놓았다”고 밝혔다.

 

심주석 1단 윗면에 만든 한변이 25㎝, 깊이 27㎝인 정사각형 사리공의 각 변 중앙에 639년 조성 당시 동·서·남·북 방위를 표시한 먹줄이 선명하게 남아있는 것도 최초의 사례에 속한다.

 

배 실장은 “심주석과 윗 부재 사이에 회를 발라 밀봉했기 때문에 삼국시대 먹줄이 지금까지 남아 있을 수 있었다”며 “금제사리호와 금제사리봉안기 등 유물을 먹줄에 맞춰 사리공에 안치한 사실히 확인됐다”고 말했다.

 

사리장엄은 사리공에 3개의 층위로 배치돼 있었다. 우선 한변이 23㎝인 정사각형의 녹색 유리판을 맨 밑에 깐 뒤 그 위에 은·동제원형사리합 6개를 놓고 합들 사이를 460점에 달하는 각종 구슬로 채웠으며 그 위에 은제관식, 얇은 비단으로 추정되는 직물(보자기)에 싼 도자(칼), 금제소형판 등을 넣었다. 그리고 맨 위층 중앙과 남쪽에 각각 금제사리호와 금제사리봉안기를 안치했다.

 

비늘문이 음각 장식된 금제족집게와 당초문과 꽃봉우리 장식이 있는 남·녀용으로 추정되는 은제관식 2점, 연꽃잎·인동당초문·연주문 등이 새겨져 있는 금제사리호 등은 백제 세공기술의 우수성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다.

 

특히 금제사리호는 동체를 상·하로 각각 나눠 제작하고 내부에 소형 사리병을 안치한 뒤 조립해 완성할 수 있도록한 이중 구조를 가지고 있다.

 

문화일보 최영창기자 ycchoi@munhwa.com 게재 일자 : 2009년 01월 21일(水)>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09012101073230074002

 

 

 

 

 

 

 

 

 

 

 

 

 

 

 

 

 

 

 

 

 

 

 

 

 

 

 

 

 

 

 

 

 

 

 

 

 

 

 

 

 

 

 

 

 

 

 

 

 

 

 

 

 

 

 

 

 

 

 

 

 

 

* 참고(1) : [미륵사지 석탑 복원 기념][앙코르 다큐] 미륵사 제1부 [1400 년의 비밀] - YouTube

* 참고(2) : [미륵사지 석탑 복원 기념][앙코르 다큐] 미륵사 제 2부 [익산은 백제의 수도였는가?] - YouTube

 

 

 

* 익산 왕궁리 유적

 

익산 왕궁리 유적(益山 王宮里 遺蹟)은 전라북도 익산시 왕궁면에 있는 백제의 유적이다. 1974년 9월 27일 전라북도의 기념물 제1호 모질메산성으로 지정되었다가, 1998년 9월 17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408호로 승격, 지정되었으며, 2015년 7월 4일 유네스코 세계유산 백제역사유적지구로 지정되었다.

 

왕궁리성이라고도 부르며 마한의 도읍지설, 백제 무왕의 천도설이나 별도설, 안승의 보덕국설, 후백제 견훤의 도읍설이 전해지는 유적이다.

 

발굴조사한 결과, 이 유적은 적어도 세 시기(백제 후기∼통일신라 후기)를 지나면서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석탑 동쪽으로 30m 지점에서 통일신라시대 것으로 보이는 기와 가마 2기를 발견했다. 특히 탑을 에워싼 주변의 구릉지를 중심으로 직사각형 모양의 평지성으로 생각되는 성곽 유물을 찾았다.

 

성곽의 모습은 현재 발굴을 통해 점점 드러나고 있다. 또한 성곽 안팎으로 폭이 약 1m정도로 평평한 돌을 깔아 만든 시설이 발견되어 성곽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이 지역 안에 있는 왕궁리 오층석탑(국보 제289호)과 절터의 배치를 알 수 있게 하는 유물, 바깥쪽을 둘러싸고 있는 직사각형의 성이 발견되어, 백제 후기의 익산 천도설이나 별도설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유적으로 떠오르고 있다. 2015년 7월 4일 독일 본에서 열린 제39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WHC)에서 백제역사유적지구(공주지역에 2곳(공산성, 송산리 고분군), 부여 4곳(관북리 유적 및 부소산성, 능산리 고분군, 정림사지, 부여 나성), 익산 2곳(익산 왕궁리 유적, 익산 미륵사지))등 3개 지역 8곳이 세계 유산 등재 심사를 최종 통과하여 세계 유산으로 등재 되었다.

 

 

 

 

 

 

 

 

 

 

 

 

 

 

 

 

 

 

 

 

 

 

 

 

 

 

 

 

 

 

 

 

 

 

 

 

 

 

 

 

 

 

 

 

 

 

* 전북 익산 고도리 석조여래입상

 

전북 익산시 금마면 동고리에 있는 석조여래입상(보물)이다. 익산 토성과 쌍릉에서 왕궁리 유적지로 가는 길에 있는 농경지 가운데 위치하고 있다. 높이 2.24 m의 거대불상으로 2구의 불상이 작은 농수로를 사이에 두고 200 m 떨어져 마주보고 있다. 사다리꼴 모양의 돌기둥에 얼굴, 몸체, 대좌 등을 표현하고 있다. 머리에는 4각형의 높은 관을 쓰고 있으며, 얼굴에는 눈, , 입이 간략하게 표현되어 있다. 미륵보살을 표현한 것 것으로 보이는데 토속적인 수호신 얼굴을 하고 있다. 신체의 표현 등도 돌기둥에 굴곡이 없으며 간략하게 선으로 표현하고 있다. 비사실적인 조각수법, 절제된 신체 표현 등 고려 초기 호족의 힘을 과시하고자 조성했던 거대 석조불상 중 하나인 것으로 보인다.

 

 

 

 

 

 

 

 

 

 

 

 

 

 

 

 

 

 

 

 

 

 

 

 

 

 

 

 

 

 

 

 

 

 

 

 

 

 

 

 

 

산포로산행기 - Sanporo Trekk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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