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이제마의 사상의학(四象醫學)을 체질의학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사상의학을 체질의학으로 이해하는 것은 일면적 이해일 뿐이며 사상의학의 의미를 왜소화시키는 것이다. 이제마 자신은 체질이라는 용어를 쓴 바가 없다. 그리고 그가 주안한 것은 체질이 아니었다.
그가 고심한 것은 삶의 문제, 삶의 건강성 문제였다. 삶이 병들고 사람다움을 잃어가는 데서 사람의 몸이 병든다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질병의 근본적 치유는 삶의 방식을 고치는데 있다고 보았다. 그러니까 그는 병을 고치는 치병(治病)의 문제를 넘어서 사람을 고치는 치인(治人)의 의학을 말하고 있다. 사상의학을 인간의학으로 말할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사상의학을 체계화한 명저가 ‘동의수세보원(東醫壽世保元)’인데 ‘수세(壽世)’와 ‘보원(保元)’이 의미하는 바도 그렇다. 수세(壽世)의 수(壽)는 삶을 의미한다. 그리고 세(世)는 세계라는 의미다. 즉 그 사람의 삶이 뿌리내리고 있는 터전 즉 삶의 현장이라는 의미다. 그리고 보원(保元)의 의미는, 수세(壽世)에 있어서, 즉 삶과 현장을 가꾸는 세상살이에 있어서 정말 소중히 지키고 가꾸어야 될 근본적 지침이라는 의미다.
그러면 이제마가 말하고 싶었던 근본적 지침은 무엇일까? 이 점은 이제마가 13년 세월에 걸쳐 심혈을 기울인 저술, 사상철학의 체계를 세운 ‘격치고(格致藁)’라는 저술에서 잘 드러나 있다. 그는 삶을 네 분면으로 통찰한다.
①사람은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이 머무를 수 있는 생존터전을 가꾸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일신의 호구지책을 해결하기 위한 차원의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생존도 소중하게 여길 수 있는 보생(保生), 활인(活人)의 정신, 측은지심(惻隱之心)에 기초한 터전이어야 한다.
②사람은 몸을 갖고 있다. 사람의 몸을 갖고 있으면 그 몸은 사람다운 행동, 인륜에 합당한 의로운 행위를 하고 살아야 한다. 그것은 외적인 강제 때문이 아니라 사람은 악을 부끄러워하는 수오지심(羞惡之心)이 있기 때문이다.
③사람은 사회적 관계를 떠날 수 없다. 서로 생각이 다르고 입장이 다르고 이해관계를 달리 하는 대중들 속에서 살기마련이다. 그러나 사람은 타인을 공경하는 공경지심(恭敬之心)이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입장과 이익을 소중히 여기고 배려하면서 공존할 수 있는 합리적 관계를 도모해야 한다.
④사람은 자기가 살고 있는 시절(天時·천시)의 의미를 알고 시절의 변화에 능히 대처할 수 있어야 한다. 인간에게는 시비지심(是非之心)이 있기 때문에 정말 시비지심이 살아있다면 천하의 시비(是非), 천하의 형세가 굴러가는 인간사의 정의를 알 것이며 그에 대처할 수 있다.
이상에서 보다시피 이제마는 세상을 향해 열려진 삶, 즉 본심이 살아있는 삶을 건강한 삶으로 말하고 있다. 그것이 건강의 원리라고 말하고 있다. 세상을 향해 닫혀지는데서 본심을 잃어가고 사람다움을 잃어가는데서 병들어가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
우리는 어디에서 열려있고 어디에서 막히고 닫혀있는 것일까? 정말 내 몸을 이롭게 하고자 하고 내 건강을 생각한다면, 내 체질에 맞추어 무엇을 먹어야할 것인가를 걱정하기 보다는 내가 어디에서 막히고 닫혀있는 바를 찾아 고민하는 것이 더 이롭지 않을까?
영남대 국사과교수·baeysoon@yumail.ac.kr 기사 게재 일자 2009-03-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