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련이 키운 '검은 케네디'… "미국에 빚 갚겠다" 정치의 길로
● 오바마 누구인가
흑백혼혈로 태어나 외조부모 슬하에서 성장
|
아버지는 케냐 출신 하와이 유학생이었다. 수업을 같이 듣던 17세의 백인 처녀 앤(Ann)과 사랑에 빠져 마우이섬으로 도망가 그를 낳았다. 하지만 두 살 때 아버지는 집을 떠나 하버드대로 유학을 떠났고, 박사학위를 받은 뒤 케냐로 돌아가 버렸다.
소년은 학교에서 아버지가 '케냐의 왕자'라고 허풍을 쳤다. 이후 교통사고 후유증을 치료하러 요양차 하와이에 온 허약하고 초라한 아버지를 보고는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다.
어린 시절 그는 인도네시아에서도 살았다. 어머니는 그가 여섯 살일 때 인도네시아 유학생 롤로(Lolo)와 재혼한 뒤 그를 데리고 자카르타로 갔다. 어머니는 새벽 4시면 그를 깨워 영어 공부를 시켰다. 언젠가는 미국 주류사회에 들어가야 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오바마는 "나는 인도네시아 아이이자 하와이 아이로, 흑인 아이이자 백인 아이로 자랐다. 그 과정에서 문화의 다양성을 배웠다"고 회고했다. 고교 시절엔 '아버지 없는 흑백 혼혈'이라는 출신 배경 때문에 정체성 고민에 빠져 마리화나와 코카인에까지 손을 댔으나 결국 극복했다.
교환학생으로 뉴욕 컬럼비아대학을 다닐 때는 '수도승' 같은 생활을 했다. 하루에 4.5㎞씩 달리고 일요일에는 금식을 했으며 삶의 기록을 남겼다. 책도 많이 읽었다. 수업이 없거나 공부를 하지 않을 때는 걸어서 도시 이곳 저곳을 다녔다. 이때의 생활은 그의 지적 수준을 급속히 향상시켰다.
그는 컬럼비아대학을 졸업한 뒤 컨설팅 회사에 취직했다. 승진도 했고 비서도 생겼으며 은행의 잔고도 제법 쌓였다. 하지만 어머니의 말이 계속 떠올랐다. "관용과 평등을 지키고 혜택받지 못한 사람들 편에 서라." 그는 결국 빈민을 위한 지역활동을 하러 시카고로 떠났다.
이후 하버드 로스쿨을 졸업하고 일리노이주 상원의원과 연방 상원의원으로 성장하면서 전형적인 정치인 코스를 밟는다. 2004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진보적 미국과 보수적 미국이란 없다. 미합중국이 있을 뿐이다"라는 명연설을 하면서 전국적인 인물로 부상했다.
2006년 그는 미 대통령이 되고 싶다는 '담대한 꿈'을 실현할 준비를 하기 시작한다. 연설할 기회가 있으면 빠지지 않았고, 민주당 동료 의원들이 도움을 요청하기만 하면 발벗고 나섰다. 참모인 데이비드 액설로드(Axelrod)는 "지지자들은 늘어났지만 그 역시 (내가 대통령이 될 수 있다고는) 확신하지 못했을 겁니다" 고 말했다.
그는 종종 선배 정치인들에게 자문했다. 가장 신뢰한 사람 중 한 명이 민주당 상원 원내대표를 지낸 톰 대슐(Daschle·2005년 은퇴)이었다. 톰은 "머뭇거리는 그에게 저는 단호하게 말했죠. 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음 기회가 오리라는 생각은 버리라고. 상원에 오래 있을수록 '그 표결에서는 왜 찬성했나?'따위의 질문에 변명할 게 많아진다고요" 라고 했다. 이 말을 들은 그는 친한 친구들과 보좌관들을 불러 대통령선거에 출마하는 데 대해 떠봤다. 대선 출마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던 사람 중엔 성공한 흑인 친구들이 많았다. 한 친구는 "아직 미국은 흑인 대통령을 받아들일 준비는 안됐어" 라고 했다. 그러나 그는 "지금 흑인 대통령을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됐다면 내가 죽을 때까지 그럴 거야. 내가 그런 선입견에 도전하겠어" 라고 답했다.
2001년 오바마는 한 인터뷰에서 부모 얘기를 꺼냈다. "그 분들은 이 나라에서 제 이름이 성공에 전혀 장애가 되지 않을 것이라 믿으며 제게 아프리카 이름 '버락'을 지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제 이야기가 더 큰 미국 이야기의 일부라는 것과 제가 이전에 이 땅에 왔던 모든 이들에게 빚지고 있음을 가르쳐주셨습니다." 버락은 이제 그 빚을 짊어진 채 더 큰 미국을 위해 백악관으로 들어간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11/06/2008110600066.html
* 결점을 자산으로 바꾸는 스타일 적 만들지 않고 살아남는 법 배워
● 오바마의 리더십
버락 오바마(Obama) 상원의원은 2006년 6월 일리노이주 노스웨스턴대 졸업식 축사에서 졸업생들에게 리더십의 조건을 이같이 설명했다. 그는 당시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감정 이입, 자신의 한계에 대한 도전, 역경에 맞서는 인내가 리더의 조건"이라고 말했다.
미국 언론들은 흑인이라는 약점을 이기고 세계 최강대국의 대통령에 오른 오바마의 인생 역정 자체가 이러한 리더십의 조건을 갖추는 과정이었다고 보도했다.
아버지 없이 자란 어린 시절이라는 핸디캡을 두 권의 자서전을 통해 전국적인 스타 정치인으로 성장하는 발판으로 삼은 것이 '결점을 자산으로 전환시킨 리더십'의 전형이라는 것이다.
또한 오바마는 적을 만들지 않는 정치인이다. 어린 시절 하와이와 인도네시아에서 다른 인종 집단과 어울려 살면서 배운 생존법이다. 6살 때 재가(再嫁)한 어머니를 따라 간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오바마는 동네의 유일한 외국인 어린이였다. 동네 아이들이 떼로 몰려들어 저수지에 빠뜨려버리자 가까스로 물에서 나오고도 동네 아이들에게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웃음을 보냈다. 적을 친구로 만드는 기법은 어린 시절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1996년 일리노이주 상원의원에 당선돼 정치에 입문한 오바마는 2000년엔 연방 하원의원에 도전한다. 그러나 이 도전은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민주당의 흑인 현역 의원인 바비 러시(Rush)를 구세대 정치인으로 비판하며 당내 경선에 나선 오바마는 지역 흑인단체들로부터 "오바마는 백인들에 의해 조종되는 사이비 흑인"이라는 평가를 받아 고배를 마셨다.
선거 패배 후 오바마는 유권자의 눈높이를 무시하고 진보적 정책만을 내세운 선거 운동이 문제였다고 시인했다. 그후 오바마는 선거운동 전략을 완전히 뒤바꿨다. CNN은 5일 "오바마의 대통령 선거 운동은 뚜렷한 실수가 없었던 미 역사상 가장 완벽한 캠페인이었다"고 평가했다.
오바마의 회의 진행 규칙도 일정하다. 논쟁이 벌어지면 대립되는 입장을 가진 양측을 번갈아 두둔하는 식이다. 그러나 막상 회의가 끝나도 오바마의 입장이 뭔지는 아무도 모른다. 결국 오바마가 최종 결정을 발표하면 회의 참석자들은 깜짝 놀란다. 회의 때 나오지 않은 제3의 입장이기 때문이다. 회의에서 보여지는 오바마의 모습은 냉정한 심의자, 유창한 소통가, 추상적인 것에는 관심이 없지만 학문적인 전문성을 갈구하는 학자의 모습이라고 뉴욕타임스(NYT)가 보도했다.
이런 오바마의 태도는 결정을 내리는 데도 이어진다. 늘 심사숙고하는 오바마는 전문가의 의견을 들으면서 가능한 대안을 검토해보고 반대측이 제기할 수 있는 문제 제기까지 충분히 파악한 뒤에야 최종 결심을 한다. 이렇게 내려진 결정은 쉽게 바꾸지 않고 밀고 나간다.
시사주간지 타임은 오바마의 성격에 관해 "언제나 냉정함을 잃지 않는 얼음과 같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도 "대공황 시절 노변담화를 통해 국민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준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친화력이 필요하다"고 타임은 보도했다.
MBA도 탐내는 '오바마 7대 성공 전략'
새로운 고객층 창조하며 경쟁없는 블루오션 개척…
브랜드도 치밀하게 계산
"오바마는 브랜드가 원하는 3가지를 모두 갖추고 있다. 새롭고(new), 차별화(different)됐고, 매력적(attractive)이다."(글로벌 광고회사 DDB월드의 키스 라인하트·Reinhard 회장)
버락 오바마(Obama)의 성공을 놓고 경영학 연구자들이 바빠졌다. 그의 대선 승리는 MBA(경영학 석사) 강좌에 오를 만한 케이스 스터디 감이라고 경영학계에선 입을 모은다. 그는 새로운 고객층을 창출하는 블루오션(Blue Ocean·경쟁이 없는 신규시장)을 추구했으며, 치밀하게 계산된 브랜드 전략을 구사해 미국 대선 사상 최대 고객(6325만 표)을 확보했다는 것이다.
미국 경영전문 월간지 '패스트컴퍼니(Fastcompany)'는 "온라인으로 지지자를 모았다는 점에서 구글의 창업자 래리 페이지(Page)와 비슷하고, 새로운 정치 수요를 창출했다는 점에서 스타벅스의 창업자 하워드 슐츠(Schultz)를 섞어 놓은 사람"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 ▲ 일러스트=이동운 기자 dulana@chosun.com
오바마는 어떻게 미국 역사상 가장 많은 유권자를 자신의 '고객'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을까. 패스트컴퍼니와 경제전문 방송 'MSNBC' 등 미국 언론의 분석을 종합해 'CEO 오바마'의 전략을 들여다봤다.
1 블루오션을 개척한다
지난 1월 민주당 대통령 후보 첫 경선이 열린 아이오와 코커스(당원대회). 당시까지 미국 언론의 대세론은 힐러리 클린턴에 몰려 있었다. 기존 방식으론 승리의 가능성이 없다고 느낀 오바마는 30대 이하 젊은 당원에게 호소하기 시작했다. 그는 투표당일 청바지를 입고 젊은이들과 농구를 하기도 했다. 결과는? 젊은 층의 참가는 이전 선거보다 4배가 늘었고, 코커스에 참가한 당원의 20%가 30대 이하였다. 힐러리 대세론이 사라진 것은 물론이다.
2 고객의 친구가 되라
삼성전자 제품을 산 뒤, 이건희 전 회장으로부터 감사 메일을 받는다면 기분이 어떨까? 오바마는 이 점을 노렸다. 오바마 선거캠프에서 유권자에게 보낸 모금(募金) 권유 이메일은 '오바마@' 혹은 부인인 '미셸 오바마@'로 시작됐다. '선거대책본부@'나 '민주당@'으로 보냈으면 지워졌을 메일도 사람들이 한 번 더 읽도록 만든 것이다.
3 철저한 계획과 단단한 팀워크
오바마는 철저하게 2007년 대통령 출마를 선언하면서 세운 계획대로 움직였다. MSNBC는 "이라크 철군 시한에 대한 언급을 빼고는 이때 세워진 계획에서 거의 변하지 않았다"고 보도했다. 벌써 그의 참모들은 대통령 재임기간 중 할 일에 대한 계획 세우기에 들어갔다. 그의 팀은 보안이 철저하기로 유명했다. 바이든 부통령 지명도 발표 전까지 어떤 언론도 미리 보도하지 못했다.
4 핵심 고객의 충성심
오바마 성공은 입 소문을 내주는 '핵심고객' 확보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영국 런던에 사는 한 지지자는 오바마의 유세 일정과 지역 내 선거 캠페인을 실시간으로 알 수 있는 휴대전화 프로그램을 스스로 개발하기도 했다. 특히 이들은 온라인에서 막강한 파워를 발휘했다. 힐러리나 매케인 등 다른 후보들의 온라인 콘텐츠들은 자신들이 만든 것인데 반해 오바마는 지지자들이 만들어 올렸다.
5 지속적인 브랜드 관리
오바마의 대선 로고는 디자인의 승리다. 다른 후보들이 자신의 이름을 강조한 밋밋한 로고를 사용한 반면, 오바마는 자신 이름의 첫 글자인 'O'를 태양으로 형상화하고 푸른색 배경을 넣어 미래로 달려가는 이미지를 상징화했다. 그는 이 로고로 변화와 희망이라는 자신의 브랜드를 극대화시켰다.
지난 8월 오바마의 민주당의 대선 후보 지명 전당대회는 오바마 브랜드의 결정체였다. 장소도 체육관을 벗어나 역동적인 미식축구 경기장을 선택했고, 대회장에서 함께 부른 노래도 로큰롤인 '더 라이징(The Rising·떠오름)'이었다.
6 일단 결정하면 밀고 나가라
부통령 후보를 상대적으로 무명인 바이든으로 결정한 것은 오바마가 가장 안전한 선택을 원했기 때문이다. 그의 경륜이 정치 신인인 자신의 부족함을 채워줄 것으로 기대했고, 현실적으로는 공화당 우세지역인 펜실베이니아 태생인 바이든의 영입을 통해 선거의 반전을 노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공화당 부통령 후보인 페일린 열풍이 불었지만 오바마는 당초 선택을 고수했다.
오바마의 선거참모인 데이비드 플루페(Plouffe)는 "한 가지 원칙을 고수하는 것이 10가지의 원칙을 세운 뒤 완벽한 결과를 찾는 것보다 낫다"며 "이것이 오바마 방식(Obama way)"이라고 말했다
7 집요해져라
네브래스카주는 선거인단이 5명밖에 없지만, 여론 조사에서 열세지역으로 나오자 마지막까지 유세를 위해 찾아갔다. 결국 5명의 선거인단은 매케인에게 돌아갔지만 끝까지 포기 않는 오바마의 집요함이 유권자들 마음을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