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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월당 싯길 (8) 금강산에서 철원으로] 그의 시 남은 보리나루는 지금 어디에

산포로 2024. 8. 16. 15:14

[매월당 싯길 (8) 금강산에서 철원으로] 그의 시 남은 보리나루는 지금 어디에

 

(문화경제 = 이한성 옛길 답사가) 매월당은 단발령에서 귀경 길에 오른다. 그것 또한 가까운 길은 아니다. 어느 길을 택하여 서울로 돌아갈까? 금강산으로 갈 때 택했던 포천 ~ 영평 ~ 김화 ~ 금성 ~ 단발령 길을 거꾸로 돌아갈까? 아니면 단발령 ~ 금성 ~ 평강/또는 김화 ~ 철원 ~ 연천 길을 택할까? 매월당은 그답게 철원 ~ 연천 길을 택하여 한양으로 돌아온다. 운수납자(雲水衲子: 구름과 물처럼 흘러가는 수행자)인 그에게는 새로운 길이 구미에 맞았을 것이다. 단발령에서 철원까지 오는 길도 만만한 길은 아니었다.

고려 때 큰 학자인 이곡(李穀)은 일찍이 금강산 유람을 했는데 그의 문집 ‘가정집(稼亭集)’에는 금강산 및 동해안 여행기인 동유록(東遊錄)이 실려 있다. “철원(鐵原)에서 금강산까지 거리가 300리이다. 그렇다면 서울(송도)에서는 실제로 500여 리 떨어진 셈이다. 하지만 그쪽 방향도 강과 산이 중첩한 가운데 길이 유심(幽深)하고 험절(險絶)하기 때문에 금강산을 출입하기 어려운 것은 역시 마찬가지이다.(自鐵原至山三百里. 則距京實五百餘里也. 然重江複嶺. 幽深險絶. 出入是山. 其亦艱哉.)

이렇게 만만치 않은 길을 택하여 매월당은 단발령을 내려왔다. 금성(金城)으로 향하는 길이다(옛 지도 참조). 고개 아래 두메마을 추정리(秋亭里)를 지나면 강 가까운 곳에 통구창(通溝/口倉)이 있었다. 나라 백성에게는 조세(租稅) 납부 의무가 있었다. 곡식이 넉넉한 지역은 세곡(稅穀)을 바치면 되었지만 이곳 회양(淮陽)이나 금성처럼 금강산 옆 두메고을들은 특산품으로 조세를 바쳤을 것이다. 동국여지승람을 보면 이 고을들의 특산품은 잣(海松子), 오미자, 삼(蔘), 복령(茯笭), 송이, 석이, 꿀, 약초 등이었다. 이들 특산품은 통구창에 모아져 강(江)을 따라 한양으로 흘러갔을 것이다.

 

화천에서 바라본 북한강. 이곳에서 북쪽은 갈 수 없는 곳이 됐다. 사진=이한성 옛길 답사가

 

금성현 옛 지도. 파란 원으로 표시된 곳이 보리나루다. 북한의 임남댐 건설로 이 일대는 모두 수몰됐다.

 

통구창을 지나 매월당은 이내 강을 만난다. 바로 북한강이다. 북한강은 회양군 사동면 신흥리(북한 주소: 금강군 신읍리)의 금강산 서쪽 골짜기에서 발원하여 금성(북한 주소: 창도군)을 지나 금강천과 금성천을 합류한 후 남쪽 땅 화천으로 흘러내린다. 이 물길은 이윽고 양구를 곁에 끼고 춘천에 이르고 청평, 대성리를 지나 두물머리에서 남한강과 만나 한강이 된다. 이렇게 흘러온 유로(流路)가 300킬로 가깝다. 후세에 이곳에 살던 다산 선생이 이곳을 읊은 싯구를 보면,
“산수와 습수가 합쳐 흐르는 곳, 마을 이름이 두물머리지(汕濕交流處 村名二水頭)”라 하였다. 예부터 북한강은 산수(汕水), 남한강은 습수(濕水)라 했음을 알 수 있다.

 

옛 철원의 한다리 자료사진.

 

그러면 매월당이 단발령을 내려와 마주한 북한강 기슭은 어디였을까? 금성현(현 북한 주소: 창도군) 창도마을 동쪽 보리나루(菩提津)였다. 옛 지도로 확인해 보면 금성현(창도군) 동쪽 북한강가에는 송포진(松浦津), 보리진, 대경진(大慶津)이 있었다. 매월당은 보리나루(菩提津)를 건너며 감회를 읊는다. 1459년 가을이었다. 560여 년 전 일이다.

보리나루를 건너며
강물은 오늘도 티끌 없이 흐르는데
비 온 뒤 맑은 햇빛 가득하구나
가을바람은 녹색 물결 살랑 흔들고
저녁 기운은 찬 물결에 잠기네
(물결 위) 배는 맑은 하늘에 점 하나 찍은 듯
산은 푸른 바다에 소라처럼 솟았구나
흥 나니 한가로이 물 보고 하늘 보고
허랑하게 다시 한 곡조 뽑는다네

渡菩提津 江水今無恙. 淸光雨後多. 秋風漾微綠. 晚氣蘸寒波. 舟似晴空點. 山如碧海螺. 興來閑俛仰. 聊復一長歌.

금강산에서 이어진 봉우리들이 삐죽이 소라처럼 북한강으로 그림자를 누이고 있었다. 가을날 푸른 북한강에 비친 산봉우리들은 얼마나 그림 같았을까? 게다가 세종실록지리지는 보리진에서 금이 생산된다고 기록하였다. 아마도 사금(砂金)이 생산되었던 모양이다. 금강산 가는 길 물 좋고 금도 나면 금수강산(金水江山?) 아니겠는가. 이제 우리도 어느 날 길이 뚫려 김화나 철원 지나 금성(창도)에 이르고 보리나루를 건너 단발령 넘어 내금강으로 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이 고개에서 겸재나 이인문처럼 금강산을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아쉽지만 답은 “아니다”이다.

‘헛된 공포의 임남댐’에 잠긴 보리나루

회양읍 북쪽 북한강 상류인 서진강에 댐이 생겼고, 아래로 금성(창도) 동남쪽 북한강에는 댐이 생겼다. 이른바 임남면에 건설되었기에 임남댐인데 우리는 금강산댐으로 부르고 있다. 이 댐으로 인해 사동면과 통구면으로 들어가는 내금강 입구가 막혔다. 보리나루는 물론 이 지역 전체가 수몰되어 옛 금강산 길은 모두 임남댐 수면 아래로 들어갔다. 이제 금강산으로 가는 길은, 반대편 외금강에서 올라오는 길과 금강산 북쪽인 회양읍 신안을 거쳐 사동면의 북쪽을 통해 말휘리로 가는 길이 유일하다고 한다. 아쉽게도 옛사람들의 발길도, 여행의 기록도 모두 수몰된 셈이다.

그런데 이 임남댐(금강산댐) 탓에 일어난 씁쓸한 기억이 있다. 1986년 이 나라 온 언론에 난리가 났다. 이른바 북한의 수공설(水攻說)이다. 북한이 200억 톤 저장 규모의 금강산댐을 만들어 수공(물 공격)을 기획한다는 설이었다. 이 댐 수문을 열면 서울 시내는 물론 6.3빌딩 3분의 1 높이까지 수몰된다는 공포스러운 이야기였다. 언론이 앞장서고 이른바 전문가 학자들이 차트에 모형까지 만들어 보여주며 국민을 가르쳤다. 돈 앞으로, 애국심 앞으로~. 우리는 모두 모두 그렇게 우리 목숨을 지켰다. 이런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대응 댐이 ‘평화의 댐’이다. 이제 자료를 찾아보니 200억 톤이라던 임남댐의 실제 저수 용량은 30억 톤 정도라고 한다. 정치 하는 이들은 그렇다 치고, 앞장섰던 언론인, 전문가, 학자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1459년 보리나루를 건넌 매월당이 1986년 그 강에서 벌어진 후손들의 이야기를 알면 어떻게 생각하실지….

보리나루를 건넌 매월당은 이내 남으로 길을 잡아 금성현(金城縣)으로 향한다. 도중에는 산마을 창도(昌道)가 있다. 세 방향은 산으로 둘러싸였지만 동쪽은 열려, 들이 제법 있었다고 한다. 나그네 쉬어갈 역이 있었는데 창도역이다.

예전에는 웅양역(熊壤驛)이라고 하였으며, 현의 북쪽 31리에 있었다(新增東國輿地勝覽). 매월당의 시는 없었는지 잊혔는지 전해지지 않는다. 일제 강점기에는 금강산 철도의 창도역이 번성하였다. 중석(重石) 산지로 유명하여 네 개의 중석 광산이 있었으며 번창한 지역이 되었다. 남북 분단 후 창도군의 중심지가 되었던 곳이다. 이제는 대부분이 수몰되었다.

매월당은 이곳을 지나 금성현으로 내려왔다. 김화의 북쪽, 동으로는 북한강을 끼고, 서로는 남대천(하류로 가면 화강, 한탄강)을 끼고 있는 풍경이 빼어난 곳이었다. 객사(客舍)는 포상각(苞桑閣)이라 했는데 그곳에는 금강산 길에 나섰던 이들의 시 수백 편이 걸려 있었다. 아쉽게도 매월당의 시는 전해지는 것이 없다. 후세에 낙전당 신익성이 금강산 길에 이곳에 들렀던 기록을 보자.

금성의 포상각(苞桑閣)은 좁고 누추한데 벽 위에는 무려 수백 편의 시가 있다. 현감이 나에게 시를 남겨달라고 하였다. 내가 농담 삼아 답하기를, ‘벽에 작은 틈도 없으니, 누각을 새로 지으면 그때 시를 짓겠습니다’라 했다.(金城苞桑閣隘陋 而壁上詩無慮數百篇 主宰請余留題 余戲答云壁間無隙地 改搆當爲賦之)

 

겸재 작 ‘피금정’. 아름다운 경치를 바라보며 마음의 옷깃을 푼다는 의미의 이름이다.

 

또 한 곳 금성에 오면 들리는 곳이 피금정(披襟亭)이다. 남대천 가에 있는 정자인데 금강산 길 나서면 이곳을 들르지 않는 이가 없을 정도로 금성의 랜드마크 같은 곳이었다. 아쉽게도 매월당의 글은 전해지는 것이 없다. 아직 피금정이 세워지지 않았는지, 글이 일실되었는지 궁금하다. 후세에 이곳을 찾은 번암 채제공(菜濟恭)의 시 한 편 읽어본다.

피금정
도화원(桃花源) 바라보니 끝이 없구나
푸른 하늘 저 먼 물가에서 피어나고
물가 나무에서 물새는 지저귀는데
소리는 들리면서 있는 곳 모르겠네
披襟亭 花源望不窮 空翠生遙渚 灌木水禽啼 聞聲不知處

마음이 한가로워진다. 나랏일로 바쁜 번암이 모처럼 피금정에 올라 도화원(桃花源) 같은 먼 곳 물길을 바라보면서 마음의 옷깃을 푸는 듯하다(披襟). 이곳을 그린 그림들도 전해지는데 표암 강세황은 웅장하게 뻗어나가는 이 지역의 산줄기를 화면 가득 채우고 피금정을 그 품에 깃든 작은 새의 보금자리처럼 그렸다.

겸재 정선은 1711년 신묘년에 대은암동 동네 어른 백석 신태동 팀의 일원으로 금강산 길에 올라 걸작 ‘신묘년풍악도첩’을 완성하였다. 이 도첩 속 ‘피금정도’를 보자. 남대천가의 피금정 모습이 사실적이다. 누각과 같이 기둥을 높이고 정자를 위에 세웠다.

이제 매월당은 철원(鐵圓)으로 향한다. 금성에서 철원으로 가는 길은 여파령을 넘고 정자연을 거쳐 가는 길과, 서쪽으로 평강을 거쳐 가는 길, 다시 남쪽으로 내려와 김화를 거쳐 가는 길이 있었다.

 

일제강점기 때 발간된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궁예도성 석등.

 

아쉽게도 매월당이 어느 길을 경유해 철원으로 갔는지는 알 수 없다. 철원은 이 지역에서 큰 고을이었다. 고려 때에는 목(牧)이었으며 조선 태종 때 도호부(都護府)가 되어 이 지역을 관할하였다. 그 관할 지역이 군(郡)이 하나이니 삭녕(朔寧)이며, 현(縣)이 여섯이니 영평, 장단, 안협, 임강, 마전, 연천이었다.

이 지역은 고구려 때부터 철원으로 경영되었는데 신라가 이 땅을 빼앗아 철성(鐵城)이 되었다. 신라 말에 궁예(弓裔)가 군사를 일으켜 905년에 도읍하고, 나라 이름을 태봉(泰封)이라 하였다. 모두 중국의 연호를 쓰던 그 시대에 스스로 연호를 수덕만세(水德萬歲), 정개(政開)라 했으니 그의 독립 정신은 우뚝한 것이었다. 왕권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918년 왕건을 비롯한 수하(手下)의 반란으로 나라를 잃고 역사의 폭군으로 기록에 남았다.

왕건이 즉위하고 도읍을 송악으로 옮긴 후 동주(東州)라 하였는데 조선 초에 다시 철원이 되었다. 매월당이 이곳을 찾았을 때는 철원도호부로 돌아온 때였다. 세종실록지리지는 태봉국의 옛터를 ‘부(府) 북쪽 27리 되는 풍천(楓川) 언덕에 있다’고 기록했다.

태봉국 역사의 원형 복원을

후세의 대동지지는 “태봉시도성(泰封時都城)은 풍천(楓川)에 있는데 원래 내성(內城)의 둘레는 1905척이고, 외성(外城)의 둘레는 2만 4421척이며 가운데에 궁전의 옛터가 있다”고 기록했다. 지금의 어디일까?

지금은 끊긴 경원선 월정리역 북쪽이다. 남과 북이 대치한 철책선 안쪽에 있어서 아무도 갈 수 없는 곳이다. 노루와 고라니의 땅에 궁예의 꿈은 묻혀 있다. 일제강점기에 발행된 ‘조선고적도보’의 빈 들에 서 있는 석등이 그 시간을 전한다. 사진으로 보더라도 걸품(傑品)이다. 매월당도 지났을 텐데 전해지는 글이 없으니 후대의 문인 이민구의 동유록(東游錄)에 있는 시 한 편으로 대신한다.

태봉의 옛 도읍
십 리의 궁성 옛 언덕에 자리했는데
천 굽이 오열하는 물에 남은 시름 있구나
산은 푸른 눈썹인 양 구름 얽힌 새벽이고
풀은 비단 치마 같고 이슬은 가을을 우는 듯
어찌 독부로 하여금 패업을 열게 할까
다만 참 군주라야 큰 계책 세운다네
목숙 선생 묘에서 읊조리며
천지 가득한 풍진에 부질없이 눈물 흘리노라 (기존 번역 전재)

泰封舊都
十里宮城枕古丘 千廻水咽有餘愁 山疑翠黛雲縈曉 草學羅裙露泣秋
豈使獨夫開覇業 只關眞主啓鴻疇 沈吟苜蓿先生墓 天地風塵空涕流

 

월정리역의 자료사진.

 

고려에 의해 기록된 궁예는, 조선은 물론 우리 세대가 국사 시험을 볼 때도 폭군으로만 가르쳐졌다. 이민구의 이 시에도 궁예는 독부(獨夫: 폭군)로, 문신 목숙 선생은 충신으로 읊어진다. 이긴 이들의 쓴 역사의 공간을 원 모습에 가깝게 다시 보고 싶어진다.

태봉국 터에서 남으로 내려오면 옛 경원선 월정리역이 있었다. 군 관할 지역 안인데 요즈음은 안보 관광 코스로 제한적 출입이 가능하다. 월정리역도 다시 재현해 놓았다. 잠시 내려오면 군 관할 지역 안과 밖으로 옛 철원도호부가 자리하고 있다. 예전에는 모두 민간인 출입 금지 지역이었으나 이제 남쪽 지역은 자유롭게 교통이 가능하다. 분단 이후 슬픈 역사인 철원 공산당사 건물이 파괴된 모습으로 서 있는 곳이다.

 

한국전쟁 뒤 다시 지은 철원역 역사 옆에는 ‘철원 역사 문화 공원’이 조성 중이다.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북으로 이어지던 3번 국도, 경원선 철도 철원역, 금강산 전기 철도 시발역, 삼방로(三防路)의 중심지였다. 분단 이후 철원을 옮겨 신철원과 동송이 철원읍을 대신하고 있다. 이 글을 쓰기 전 늦겨울 공산당사를 다시 찾아가 보았다. 철원 역사 공원이 세워지고 있었다. 아직은 을씨년스럽지만 태봉국의 역사도, 금강산 길의 역사도, 철도 길의 역사도, 분단의 아픈 역사도 함께 살려 주면 좋겠다.

아쉽다. 매월당의 철원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그는 도호부를 떠나 보개산(寶蓋山)으로 향했다. 1459년 가을 해가 기우는 날에.

 

이한성 교수

 

제777호 이한성 옛길 답사가  2024.08.14 09:0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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