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종양 정확히 찾아냈다…암세포 구별해내는 우표만한 칩의 정체는
‘꿈의 물질’이라 불리는 그래핀이 뇌의 비밀을 풀어줄 열쇠로 떠올랐다. 우수한 전기전도도와 얇아서 잘 휘어지는 유연성을 활용해 ‘그래핀칩’을 만들고, 이를 뇌 표면에 붙이면 뇌가 보내는 신호를 정밀하게 파악할 수 있다. 영국 과학자들이 처음 관련 임상에 성공했다고 발표하면서 전세계 연구자들이 들썩이고 있다.
뇌종양 수술은 정상 뇌 조직에 미세하게 침윤돼 있는 암 세포를 깔끔하게 제거하는 것이 관건이다. 그래핀 브레인칩을 활용하면 ‘암 세포만 정확히 골라내는 것’이 가능해져 뇌종양 수술의 신기원을 열 것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4일 과학기술계에 따르면 영국 솔퍼드왕립병원에서 최근 한 뇌종양 환자를 대상으로 브레인칩 이식 수술이 진행됐다. 환자 두개골 일부를 제거하고, 0.3나노미터(㎚·1㎚는 머리카락 두께의 약 5만분의 1) 두께의 아주 얇은 칩을 뇌 표면에 설치했다.
브레인칩 개발업체인 스페인 ‘인브레인 뉴로일렉트로닉스’의 코스타스 코스타레로즈(영국 맨체스터대 나노의학과 교수) 설립자는 “정상 뇌 세포와 비정상 암 세포를 구별하는 데 그래핀 기반의 뇌·컴퓨터 인터페이스(BCI) 장치를 사용했다. 이는 전 세계 최초의 임상시험”이라고 강조했다.
우표 크기의 이 칩은 수천 개의 전기 접점을 가지고 있다. 이 접점을 통해 뇌신호를 읽으면 함께 달린 송신기가 관련 정보를 외부로 보내는데, 이를 해석하면 정상 뇌 조직과 암 세포를 구별할 수 있다. 이번 연구의 가장 큰 성과는 마이크로미터(㎛·1㎛는 100만분의 1m) 수준의 정밀도로 뇌 신호를 파악했다는 점이다. 통상 거미줄 가닥 굵기가 3~8㎛임을 감안하면, 현미경으로 세포를 들여다보듯 정밀하게 정상세포와 암세포를 구별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사람 뇌에는 약 860억개의 신경세포가 존재한다. 이 신경세포들은 서로 시냅스로 연결돼 있다. 사람이 움직이고, 무언가를 느끼고, 생각할 때마다 작은 전기 자극이 생성돼 하나의 신경세포에서 다른 신경세포로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르게 전달된다. BCI는 이 체계를 해독하고 컴퓨터로 신호를 보내 사람의 뇌와 컴퓨터를 연결하는 인터페이스다.
일론 머스크가 이끄는 ‘뉴럴링크’ 등이 BCI를 실현하려는 대표적인 기업으로 꼽힌다. 과학계에서는 뇌에 손상을 주지 않고, 뇌 신호 해독의 정확성과 해상도를 높이는데 주력 중이다. 뇌 표면에 전극을 붙여 뇌 신호를 읽으려는 시도가 가장 많지만, 내부에 전극을 심는 것에 비해 해독 정확성과 해상도가 떨어지는 것이 단점이다.
인브레인 뉴로일렉트로닉스 연구팀은 그래핀이라는 신소재에 주목했다. 브레인칩 연구자인 조일주 고려대 의대 교수는 “그래핀을 전극으로 사용하게 되면 저항이 적어 신호를 읽는데 있어 노이즈가 적다”며 “전극으로 백금 등 다른 재료도 쓰이는데, 그래핀만한 성능을 따라오는 소재가 없다”고 설명했다. 조 교수는 “그래핀이 체내에서 안정되게 유지되는 것이 어렵다”며 “임상에 들어갔다는 것은 그래핀의 독성에 있어 안전성이 어느 정도 검증됐다고 볼 수 있다”고 평가했다.
이 물질을 발견한 것만으로도 노벨상을 받을 수 있었다. 2010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콘스탄틴 노보셀로프 싱가포르국립대 교수(전 영국 맨체스터대 교수)는 연필심의 재료인 ‘흑연’을 스카치테이프로 몇 번 붙였다 떼었다하다가 그래핀을 발견했다. 흑연은 그래핀을 세로로 층층이 연결한 물질이었다. 그는 흑연에서 그래핀을 분리하는데 성공했다.
노보셀로프 교수는 현재 인브레인 뉴로일렉트로닉스의 자문위원회 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그는 “그래핀의 뛰어난 특성이 의료 기술의 새로운 지평을 열고 있다”며 “이번 임상시험은 획기적인 성과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번 임상 때 설치한 브레인칩은 현재까지 정상 작동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그간 뇌 세포 신호 중 주파수가 높거나 낮은 경우 파악이 힘들었는데, 이 신호들까지 모두 감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인브레인 뉴로일렉트로닉스 연구팀은 “뇌의 광범위한 전기 신호를 매우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번 임상은 그래핀을 활용한 브레인칩의 첫 임상 시험이라는 의미가 있다. 인브레인 뉴로일렉트로닉스 외에도 그래핀을 활용한 브레인칩을 여러 연구팀들이 개발 중이다. 이 회사는 이번 임상에서 약 10명의 환자를 대상으로 브레인칩을 삽입할 예정이다. 뇌종양 세포와 비교해 건강한 세포에서 전기 신호가 어떻게 전달되는지에 대한 이해를 훨씬 높일 것으로 기대된다. 이를 바탕으로 뇌졸중과 간질을 포함한 다른 여러 질환을 연구하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대한뇌종양학회에 따르면 국내에서 매년 2500~4500명의 뇌종양 환자가 발생한다. 뇌종양으로 약 2만여 명이 고통받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며, 뇌종양 환자의 5년 생존율은 65%로 다른 암에 비해 낮은 편이다.
매일경제 고재원 기자 ko.jaewon@mk.co.kr 입력 : 2024-11-05 05:58: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