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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실험실 이야기 시즌 2] 매뉴얼의 미로: 과학자의 고민

산포로 2024. 5. 10. 09:34

  [나의 실험실 이야기 시즌 2] 매뉴얼의 미로: 과학자의 고민

 

저의 글은 정확한 지식이나 권고를 드리기 위해 쓰인 것이 아닙니다. 제가 연구실/강의실에서 경험한 것을 여러분과 글로 나누고, 일에 매진하시는 우리 연구자들에게 잠깐의 피식~하는 웃음 혹은 잠깐의 생각, 그 이상은 바라지 않습니다.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시면(3초 이상) 안 그래도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여러분의 뇌세포가 안 좋아지니, 가볍게 읽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매뉴얼대로 살아만 간다면 과연 꿈꿀 수 있을까?" 1999년에 발표된 가수 유승준의 노래, 제목이 비전입니다. 이 노래 가사는, 매뉴얼대로 사는 것보다는, 다른 방식으로 살아볼 것을 고려해 보라는 내용입니다. 당시 이 노래는 인기가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여 년의 시간이 지나고 보니, 현대 사회는, 노래 가사와는 다르게, 매뉴얼을 선호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미국이라는 나라는 매뉴얼의 국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문서화되어야 하고, 그렇게 되어 있고, 그에 따라 움직입니다. 이곳의 사람들은 어려서부터 그것들을 배워서 그런지 익숙하게 살아갑니다. 매뉴얼의 장점은 개인의 특출함이나 뛰어난 능력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미국에서 Physical Therapy(PT)라는 게 있습니다. 한국말로 직역하면 물리치료지만, 미국의 PT는 한국의 물리치료와는 약간 다릅니다. 물리치료사는 의과대학에 속한 프로그램에서 공부하고, 졸업할 때, 박사학위 (Doctor)를 받게 됩니다. 제가 이전에 PT를 받을 기회가 있었는데, 그곳에 계신 선생님들은 제게 특정한 PT의 동작을 가르치시고, 저는 그 동작들을 따라 했습니다. 가르치시는 동작들이, 나중에 알고 보니, 다 매뉴얼에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제가 집에 갈 때면, 제게 친절하게 매뉴얼의 일부를 출력해서 주시면서, 집에서도 계속하라고 숙제를 내주셨습니다. 물론 저는 성실하게 치료 동작들을 따라 했습니다. 

 

 

제가 처음 생화학 실험을 시작할 때, 저는 걱정이 많았습니다. 생화학이라고는 학부 때, 수강했던 생화학1이 전부인 제가, 실험을 하다니, 가당치도 않게 여겨졌습니다. 그때, 지도교수님이 제게 해 준 조언은, '그냥 매뉴얼대로 해 봐'였습니다. 저는 그 말대로, 여러 회사에서 제공한 매뉴얼을 서너 개 찾아서 비교해 가면서 읽어보고 그대로 따라 하니, 신기하게도 잘 되는 것입니다. '오, 신기하다. 그냥 따라 하면 되네.' 어쩌면 제가 했던 실험들이 너무 단순한 것들만 있었는지도 모르겠지만, 난이도로만 봤을 때, 중급의 레고와 비슷하게 여겨졌습니다. 아무튼, 우리는 생화학의 새로운 기법을 개발하는 그룹이 아니었고, 그냥 알려진 기법들을 사용하기만 하면 되는 그룹이었기에, 그렇게 지금까지 일을 해오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매뉴얼은 우리의 일을 쉽게 할 수 있도록 돕는 순기능이 있습니다. 더 친근한 예로, 요즘은 어디를 가던지 패스트푸드 가게들이 많은데, 거기서 파트타임으로 일을 할 때, 요리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어도 괜찮습니다. 회사에서 제공하는 매뉴얼을 그대로 따라 하면 맛있는 음식이 만들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매뉴얼대로 돌아가는 사회가 좋기만 할까요?

 

저는 가끔 학생들의 세미나를 듣다가 질문을 합니다. '왜 그 부분에서 그렇게 했나요?'라고 물으면, 거의 열에 아홉은, '매뉴얼/다른 사람의 논문/연구실 프로토콜에 그렇게 적혀있었습니다'라고 대답을 합니다. 그럼 나는 그 대답을 받아서, '혹시 그 부분을 이렇게 혹은 저렇게, 다른 방식으로 시도해 보았다면 어땠을까요?'라고 질문을 하면, 또 열에 아홉은, '뭐지?' 하는 표정으로 저를 바라봅니다. 

 

가끔 복도를 지나다가, 다른 교수님들이 학생들과 대화하는 내용을 무심코 듣게 되는데, 교수님이 학생에게 '결과가 왜 이렇게 나왔지?'라고 물으면, 보통의 학생들은 '참고논문 혹은 실험 프로토콜에 적혀 있는 대로 했습니다.'라고 대답을 합니다.

 

제가 처음 시작했던 무기합성화학 실험은 매뉴얼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고, 있는 것들은 거의 20-30년 전 논문들이었습니다. 사실, 제가 하려고 했던 화학 합성물은, 이전에 임상실험에서 실패를 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 분야를 떠난 상태였고, 우리는 그 일을 새로운 방식으로 개량된 화합물들을 합성하려고 시도하던 때 습니다. 게다가 이전에 보고된 논문들은 화학자들이 아닌 다른 과학자들이 보고한 것들이라 합성 방식이 지나치게 단순하고, 제한적이었습니다. 그래서였는지, 저보다 6개월 먼저 합성을 시작했던 학생은, 계속해서 실패의 쓴 맛을 연속적으로 마시고 있었습니다. 제가 연구실에 합류하고, 그 친구가 제게 일을 가르쳤을 때, 제게는 단순하고 원론적인 질문들이 떠올랐고, 그 친구에게 그것을 물었을 때, 그 친구의 대답도 같았습니다. "나는 그냥 논문을 따라 했어."

 

저도 그 논문을 여러 번 검토해 봤는데, 도무지 논문 저자들이 보고한 수율(yield)이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요즘도 그런지 모르겠지만, 예전에는 화학을 하는 사람들이 기피하는, 특정 지역들의 논문이 있었습니다. 공공연히, 그쪽 동네(?)의 논문은 참고문헌에 넣지 않는 게 좋겠다는 말이 오갔더랬습니다. 아무튼, 제가 본 논문도 그 비슷한 쪽의 것이었습니다. 실험은 두어 번 시도했고, 저 역시 참패를 면치 못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논문을 꺼내 들고, 그 논문에 실린 참고문헌들을 샅샅이 뒤지다가, 일본 사람들이 그 이전에 제안했던 다른 방법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방법을 따라 하니, 잘 됩니다. 그러나 보고된 수율이 낮았고, 우리가 처음에 봤던 논문처럼 수율이 잘 나오지 않았습니다. 저는 높은 수율의 비밀을 찾으려고 계속 애를 썼고, 참고문헌의 저자들이 기록하지 않았던, 그 비밀을 찾아내었습니다. 

 

'만일 처음부터 논문의 저자들이 실험 매뉴얼을 잘 만들었으면 어땠을까?'라는 생각도 해봤고, 조금은 원망스럽기도 했지만, 중요한 핵심 기술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던 저자들이 아주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분명히 매뉴얼로 움직이는 사회는 편하고, 수월하게 일할 수 있는 환경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하는 일들의 많은 부분은 여전히 매뉴얼이 없는, 아니 매뉴얼을 스스로 만들어 가는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고통스럽고, 그래서 일이 성취되었을 때, 큰 즐거움이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아마도 우리는 그런 게 좋아서, 이 일들을 하는 게 아닐까요?

 

오늘도 부족한 글을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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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C(ibric.org) Bio통신원(김종현) 등록일2024.05.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