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길을 잃었을 때 돌아보는 책] 힘들어도 괜찮아, <Gene Machine, Venki Ramakrishnan 저>

산포로 2024. 3. 22. 14:45

[길을 잃었을 때 돌아보는 책] 힘들어도 괜찮아, <Gene Machine, Venki Ramakrishnan 저>

 

지금은 눈물이 메말라 더 이상 울지 않지만, 심혈을 기울여서 한 실험이 잘되지 않을 때 눈물을 쏟던 대학원 저년 차 시절이 있었습니다. 실험과학자가 실험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데 과연 밥은 잘 벌어먹고 살 수 있을지 걱정이 가득 차 있던 시절, 지도교수님과의 면담 시간은 매우 잦았고 또 길었습니다. 과정이 긴 실험을 하다가, 마지막 단계에서 실수를 했을 때 저도 모르게 눈물이 터졌던 날이었습니다. 동료들이 다 퇴근하고 혼자 있던 연구실이었기에 한번 크게 울고 마음을 다스렸습니다. 늦은 퇴근길에 올랐던 교수님은 마침 연구실을 돌아보러 왔다가 눈물을 닦던 저를 보셨습니다. 문 앞에 한참을 서서 이런저런 얘기를 해주시다, 결국에는 퇴근가방을 풀고 다시 교수님의 오피스로 돌아가서 긴 면담을 했습니다.

 

교수님은 항상 책을 읽는다고 했습니다. 근래에는 벤키 라마크리슈난(Venki Ramakrishnan) 박사의 <Gene Machine>을 재미있게 읽었다며, 제가 꼭 한 번 읽어봤으면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저명한 과학자도 항상 불안해하고, 불평하고, 실패하면서 학문적 성취를 추구해 나가는데, 어떻게 우리가 매번 성공만 할 수 있겠냐는 것입니다.
 

(표지 출처: Amazon US)

 

벤키 라마크리슈난 박사는 리보솜의 3차원 구조를 밝힌 연구로 2009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한 구조생물학자입니다. 구조생물학은 참 특이하죠. 순수한 생물학도 아닌 것이, 딱히 완전한 화학은 아니고, 그렇다고 물리학도 아닌 그 사이 어딘가에 있는 분야 같습니다. 요즘은 오히려 컴퓨터 사이언스는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지요. 굳이 분류하자면 하드코어 biochemistry 혹은 biophysics 정도가 될까요? 라마크리슈난 박사의 학문적인 여정 역시 그의 연구 분야와 마찬가지로 어느 하나로 규정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물리학 학사와 박사를 마친 이론물리학자였습니다. 하지만 이내 이론물리학에 흥미를 잃었고, 생물학에 보다 큰 관심을 갖게 됩니다. 단순히 생물학이 “재미있어 보였기 때문에” 그는 다시 생물학 대학원에 진학해 2년 동안 기초 생물학 지식 및 실험 방법을 배우게 됩니다. 이와 더불어 그의 물리학적 배경은 중성자산란 및 X-ray crystallography를 이용해 리보솜의 구조를 밝히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저도 한때는 과학자의 자전적인 에세이를 많이 찾아 읽기도 했는데요. 대학원생이 되어 손대는 실험마다 실패에 실패를 거듭하다 보니, 스스로가 약간 냉소적으로 변하면서 더 이상 그런 책을 읽지 않게 되더군요. 많은 사람들이 그랬듯 저도 제임스 왓슨의 <이중나선>을 읽으면서 감동받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저 역시 nucleic acid의 구조를 연구하게 될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죠!) 하지만 언제부터인지, 그런 사람들은 어차피 떡잎부터 달랐으니까, 그들이 뭐라고 얘기하든 저와는 거리가 멀어도 아주 먼 이야기라고밖에 들리지 않더군요. 라마크리슈난 박사의 예시까지는 갈 것도 없이, 잘나도 너무 잘난 주위 사람들 때문에 기죽는 순간들도 많았습니다. 한 번은 옆 연구실 선배에게 “걔들은 너무 overachiever야. 그래서 너무 스스로가 작아져서 힘들다”라고 불평한 적이 있습니다. 선배는 단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너도 overachiever야!”라고 답해 주었습니다. 저도 다른 사람을 보며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다른 누군가도 저를 보며 참 잘하고 있다고 생각해주고 있겠지요. 라마크리슈난 박사 역시 생물학에 배경이 깊지 않아 부족함을 느끼던 순간들이 많았음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재미를 느낀 연구 주제 하나만을 바라보고 정진하여 큰 발견을 이루어 낼 수 있었음을 이 책을 통해 배웠습니다.

 

<Gene Machine>의 부제는 The Race to Decipher the Secrets of the Ribosome입니다. 라마크리슈난 박사는 사실 2009년 노벨화학상을 다른 두 명의 과학자들과 함께 공동수상했습니다. 특히 공동수상자 중 한 명인 아다 요나트 박사와의 경쟁이 이 책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학계에 이미 자리를 잡은 스타 과학자와 신진 과학자들 간의 미묘한 권력구조와 신경전, 그리고 인기 많은 연구 주제에 뛰어든 수많은 과학자들의 경쟁을 많이 솔직하다 싶을 정도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과학계에는 과학을 향한 순수한 열정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해할 수 없는 관행과 관료주의, 이기심과 욕심, 그리고 경쟁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 수 있습니다.

 

“너 그 책 읽었어 안 읽었어?” 제발 교수님, 읽었어요 읽었어… (이미지 출처: Pixabay, Miroslavik)

 

연구가 뜻대로 풀리지 않아 제가 울적한 낌새가 있으면 지도교수님은 그 책에서 뭘 배웠는지를 다시 떠올려 보라고 하십니다. 시간이 지나 어느새 저도 연구실 최고참이 된 만큼, 지금은 면담이 예전처럼 길어지지도 않을뿐더러, 그 빈도도 확연히 적습니다. 오히려 불쑥 서로의 오피스 앞에 나타나 “Hi”도 없이 본론으로 들어가 진행 중인 실험에 대해 즉석에서 디스커션을 하는 것이 주가 되었습니다. 지도교수님도 저도, 서로 다른 분야를 전공하고 연구하며 돌고 돌아 결국 RNA 구조생물학에 정착하였습니다. 항상 생각대로 빠르게 진도가 나가지 않는 연구에 답답함과 부족함을 느끼고 있지만, 이 시간 같은 궁금증을 가지고 같은 주제에 재미를 느끼며 연구를 끌어오고 있다는 사실에 만족하며 저희 연구실은 오늘도 묵묵히 함께 걷고 있습니다. 벤키 라마크리슈난 박사 역시 그랬던 것처럼.

 

본 기사는 네티즌에 의해 작성되었거나 기관에서 작성된 보도자료로, BRIC의 입장이 아님을 밝힙니다. 또한 내용 중 개인에게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사실확인을 꼭 하시기 바랍니다.

[기사 오류 신고하기]

 

BRIC(ibric.org) Bio통신원(미윤(필명)) 등록일2024.03.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