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잃었을 때 돌아보는 책] 과학과 세계, <과학의 반쪽사, 제임스 포스켓 저>
영화 “천문: 하늘에 묻는다 (2019)”를 보면서 제가 가장 좋아했던 장면은 장영실이 간의를 발명해서 처음으로 천문 관측을 하는 장면이었습니다. 나라의 말이 중국과 달라서 문자와 서로 통하지 아니했던 것처럼, 조선의 시간도 중국과 달라서 백성들이 농사를 지음에 종종 어려움이 있던 시절이었습니다. 세종과 장영실은 비로소 조선의 시간에 맞춰 생활하고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되어 기뻐했고, 그들의 즐거운 표정은 그들 머리 위 어두운 밤하늘을 수놓은 별처럼 빛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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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천문: 하늘에 묻는다, 2019년”, 포스터 출처: 네이버 영화그랬기에 영화의 가장 슬픈 장면은 간의가 끌어내려져 부서지는 장면이었습니다. 우리나라 과학의 역사가 얼마나 기억되지 못한 채 묻혀 있는지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 역시도 우리 역사 속 과학에 대해서는 장영실을 제외하면 거의 아는 바가 없는 것 같습니다. 사실 장영실에 대해 아는 것조차도, ‘그런 사람이 있었고, (객관식 시험에 나오는) 이러저러한 이름의 발명품을 만들었더라’가 전부일뿐 어떤 과학적 배경이 있었으며 그것이 과학의 역사 속에서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는 잘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제임스 포스켓의 <과학의 반쪽사>를 처음 손에 들었을 때, 우리나라의 과학에 대해서도 조금 다뤄주고 있진 않을까 하는 기대를 했습니다. 비록 동아시아 지역에 관해서는 중국과 일본의 잊힌 과학사만을 다루고 있어 아쉽긴 했지만요.
그러나 이 책에서 우리나라에 대한 언급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닙니다. “조선 같은 중국의 속국 (117p)”에서는 달력을 제작하는 등의 일이 과학이 아니라 단지 황제에 대한 충성심을 보여주는 수단으로써 정치적인 중요성만을 가졌다는 문장이 하나 있었습니다. 이 두꺼운 책에 겨우 한 문장으로만 등장한 우리나라가 이렇게 묘사되고 있다니 마음이 아팠습니다. 사실 저는 여기서 책을 읽는 데 중대한 고비가 찾아왔습니다만, 세계사는 엄연히 불평등한 권력관계 속에서 발전하고 기록된 것임을 기억하며 꾹 참았습니다. 잊힌 역사를 조명하는 책이 나오기 시작한 것이 잘못된 사실을 바로잡는 첫걸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발걸음이 모여 앞으로 세계 과학사가 보다 균형 있는 시각으로 쓰일 것이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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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이슬람 세계와 인도의 과학을 시작으로 아시아와 중동, 그리고 남미의 과학사에 대한 연구는 느리지만 서서히 시작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프리카, 특히 사하라 사막 이남의 과학에 대한 관심은 여전히 적으며, <과학의 반쪽사>는 주류 과학사에서 주목받지 못했던 이와 같은 지역을 집중해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게임 ‘시드마이어의 문명’ 시리즈에서만 봤던 아프리카 말리의 도시 팀북투에서도 그 옛날부터 과학이 싹트고 있었다는 사실은 책을 읽기 전에는 알 수 없었습니다. 이슬람교는 7세기부터 아프리카에 들어오기 시작해 14세기가 되어 아프리카 전역으로 퍼지게 됩니다. 따라서 아프리카 지역의 과학은 이슬람 세계로부터 영향을 주고받으며 발전합니다. 북아프리카와 메카를 방문한 성지순례객들을 타고 들어온 방대한 아랍어 과학 저술 속에는 고대 그리스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시작하여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이, 그리고 이에 대한 이슬람 천문학자들의 최신 주석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발전한 아프리카의 천문학은 상인들이 더 안전하게 사막을 횡단하여 외부 세계와 교역할 수 있게 했고, 더 발전한 기술과 정보의 교류가 선순환 구조를 이루며 따라왔습니다. 결국 고대 그리스의 과학, 이슬람 세계의 과학, 아프리카의 과학이 모두 이어져 있는 것입니다.
서로 이어져 있는 역사로서의 과학은, 어느 한 지역의 과학이 너무나도 우월해서 다른 지역으로 일방적으로 흘러 들어간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며 발전한다는 뜻일 겁니다. 중국에서 발명된 종이는 중앙아시아를 거쳐 유럽으로 퍼졌고, 유클리드의 <기하학>을 비롯한 수많은 고대 그리스 문헌은 실크로드를 따라 인도와 중국을 포함한 동아시아로 퍼졌습니다. 십자군 전쟁을 통해 유럽에서는 이슬람 세계의 과학을 받아들이게 되었고요. 또한 재밌는 것은, 남의 것을 통해서 우리의 것을 돌아보는 경우가 많았다는 사실입니다. 명나라의 관리 서광계는 서양 과학을 통해서 <구장산술>이 쓰였던 기원전 3세기, 중국의 과학이 꽃피던 시절을 다시 보고자 했습니다. 유럽이 이슬람 세계의 과학을 돌아보면서 중세 시대에 소실된 그리스 고전을 다시 찾게 된 것처럼 말입니다.
이 책에서는 과학사가 세계사와 떼어 놓을 수 없다는 사실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제국주의 시대에는 진화론이 탄생했고, 다윈의 <종의 기원>은 십여 개의 언어로 전 세계에 번역되었으며 그중에는 일본어도 있었습니다. 이에 따라 적자생존의 논리가 일본의 아시아 침략을 일부 정당화하기도 했지요. 오늘날은 어떨까요? 우리는 미국과 중국의 패권경쟁으로 신냉전 시대에 접어들었다고도 합니다. 세계화가 일어나는 동시에 역설적으로 민족주의가 부상하고 있기도 하지요. 각국은 자국의 과학자들이 학문의 공용어인 영어로 연구 결과를 세계에 발표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격려하며 이를 국가 경쟁력의 중요한 수단 중 하나로 삼고 있습니다. 냉전시대의 군비경쟁은 핵무기를 통해 이루어졌지만 오늘날 신냉전시대의 군비경쟁의 수단은 과학이 아닌가 합니다.
그렇기에 과학의 미래를 보려면 과거를 살펴야 할 것입니다. 서구 중심으로 쓰인 과학사에서 다루지 못한 채 남겨졌던 나머지 절반의 과학사를 보면, 과학의 발전에는 어두운 면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근대 천문학자들은 노예선을 타고 항해했고 박물학자들은 식민지 무역회사에서 일했습니다. 양차대전 시기 물리, 화학자들과 공학자들은 군수산업에 기여했으며 유전학자들은 우생학을 탄생시켰습니다. 오늘날 과학의 발전도 착취에 일부 토대를 두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예컨대 인공지능 기술의 발전은 수많은 사람들의 개인 정보를 수집해서 알고리즘을 훈련시켰기 때문에 가능하고, 이렇게 고도화된 인공지능 기술은 사람들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사용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코로나19 팬데믹 시기 사람들의 이동 동선을 국가가 수집하고 공개하는 것이 어디까지 허용되어야 하는지 활발한 논의가 있었습니다. 또한 과학이 군비경쟁이 수단이 된 지금, 우주과학 혹은 정보기술에 있어서의 한 국가의 큰 과학적 성취는 민족주의적 이익을 뛰어넘어 과연 얼마나 온전히 공유되어 세계의 과학 발전에 기여할 수 있을까요?
보는 것을 믿기보다 믿는 것을 보는 사람들이 늘고 있는 시대입니다. 특히 지난 팬데믹을 거치며 과학을 믿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강한 알코올이나 표백제를 마셔서 코로나19 바이러스를 치료할 수 있다는 등의 가짜뉴스도 검증 없이 퍼져서 수많은 인명 피해를 낳기도 했습니다. 오늘날 과학은 어떻게 발전하고 있고, 이렇게 발전한 과학은 어떤 미래를 열어 줄까요? 과학 발전이 좋은 미래를 가져다줄 것이라 믿고 마냥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보다 능동적으로 과학을 판단의 수단으로 삼고 이용하여 다가올 미래를 아름답게 꾸려가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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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C(ibric.org) Bio통신원(미윤(필명)) 등록일2024.05.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