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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잃었을 때 돌아보는 책] 걸어온 길, 걸어갈 길, <직업으로서의 학문, 막스 베버 저>

산포로 2024. 7. 1. 14:14

[길을 잃었을 때 돌아보는 책] 걸어온 길, 걸어갈 길, <직업으로서의 학문, 막스 베버 저>

 

제가 가장 좋아하는 책을 소개하며 [길을 잃었을 때 돌아보는 책]의 연재를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길을 잃었다고 느꼈을 때 연재를 시작하기로 결심했고, 원고를 적어 내려가는 몇 달의 시간 동안은 그럭저럭 잘 살아왔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글을 시작하는 지금은 잘 풀리지 않는 실험과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다시 길을 잃은 듯한 느낌이 듭니다.

 

불안함이 몰려올 때면 항상 비교가 시작됩니다. 내가 훨씬 좋은 연구 환경에 있었다면. 돈이 많고 사람이 많으니까 당연히 좋은 연구 결과를 빠르게, 많이 뽑아낼 수 있지는 않았을까? 능력 있는 사람들 중에 더 능력 있는 사람을 고르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세부적인 기준이 필요하며, 그렇게 쥐어짜 내듯 만들어진 세세한 기준은 모두 정당할까? 고도로 전문화되고 있는 학문의 세계에서, 교육 훈련 기간은 끝도 없이 길어지는 와중에 대체 나는 어디까지 뭘 더 해야 하는 걸까? 막스 베버의 <직업으로서의 학문> 역시 “거친 요행의 세계 (p.36)”를 걷고 있는 학자들에게 학문을 직업으로 하는 것의 고달픔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길 위에 빛나고 있는 하나의 의미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표지 출처: yes24.com

 

베버는 후배에게 학문의 길을 가도록 격려하는 것은 다소 무책임하며, 상처를 입지 않고 그 어려움을 참아 내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고 했습니다. 특히 의학이나 자연과학분야의 연구는 이제 대규모의 자본이 없다면 수행하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습니다. 더불어 학문은 극도로 전문화되고 있기에 결과적으로 개개인의 과학자는 개별 연구의 주인이기보다는 거대한 연구 프로젝트의 작은 부속품처럼 느껴지기 쉽다고도 합니다. 20세기 초 베버가 살던 시대에도 이미 학자로서 좋은 위치에 간다는 것은 다른 어느 직업군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요행이 크게 지배하는 일이 되어 버렸습니다. 따라서 백 년이 지난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학문의 세계에서 힘겹게 발버둥 치고 있는 현실은 매우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저는 이곳에서 살아남고 싶기에 이다음 단계에서는 어떻게 더 좋은 환경으로, 연구비와 인력이 더 많은 곳으로 차근차근 옮겨 나갈 수 있을지 끊임없이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럴 수 있기 위해 저를 어떻게 잘 포장해서 팔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하기도 합니다. 결국 저는 다른 수많은 사람들과 달라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저의 개성은 무엇일지, 제가 가진 것들을 바탕으로 앞으로 어떻게 하면 더 효율적으로 돋보이고 잘할 수 있을지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저는 학부 전공보다는 지금 하고 있는 공부에 더 큰 흥미를 느끼고 있지만, 혹시나 제가 떠나온 길로 다시 돌아간다면 지금 연마하고 있는 새로운 전문성을 바탕으로 더 특별한 사람이 되어 좋은 기회를 얻을 수는 있지 않을까 묻고 다닌 적이 많았습니다. 그럴 때마다 많은 분들은, 특히 저와 비슷한 길을 걸어오셨고 꽤나 큰 성취를 이룬 분들은 모두 똑같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학문의 길을 걷고 싶다면 이제껏 걸어온 길을 돌아보지 말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지난날 무엇을 했고 어디에 있었고는 상관이 없다고, 오직 앞으로 걸어갈 길만이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기존에 해왔던 것에 안주하며 쉬운 길을 찾고자 하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를 돌아보라고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스스로 무엇을 하고 싶고 무엇을 알고 싶은지라고. 이제껏 해온 것들을 바탕으로 쉬운 길을 찾고자 하는 거라면 학문의 바깥에 얼마든지 그런 길은 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걸 원하는 것 같아 보이지 않는다고, 단지 고민이 많은 순간은 언제든 찾아오니 그런 때일 뿐이라고, 그러니 흔들리지 말고 앞만 보고 걸어가라고 했습니다.

 

책에서도 이야기합니다:

 

“학문영역에서는 순수하게 자신의 주제에 헌신하는 사람만이 <개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중략) 어떻게 하면 내가 단순히 <전문가>와는 다른 어떤 존재임을 증명할 수 있을까, 또 어떻게 하면 나는 형식이나 내용 면에서 다른 누구도 말하지 않은 그런 방식으로 무언가를 말할 수 있을까라고 묻는 사람, 이런 사람들은 <개성>을 가진 사람이 아닙니다. (pp.44-45)”

 

내가 가진 것을 어떻게 멋지게 포장해서 잘 팔리게 할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을 할수록 스스로가 거짓말쟁이가 되는 것 같았습니다. 결국 묵묵히 해야 하는 것만이 중요한 것임을 자꾸 잊어버리게 됩니다. 그러면 어떤 믿음을 가져야 힘든 순간에도 묵묵히 해 나갈 수 있는 것인지. 한때 과학이 세상의 의미에 대한 답을 줄 수 있지는 않을까 생각했지만, 보편적인 세상의 의미는 어쩌면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단지 나름의 의미를 찾는 사람들에게 생각하는 능력을 줄 수는 있다는 믿음이 생깁니다. 저는 연구실에 있는 것도 좋지만,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이곳저곳 쏘다니며 공상하고 글을 쓰는 것도 좋아합니다. 가끔 시간낭비라고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일분일초가 아까운데 저도 옆 친구처럼 연구실에 박혀서 연구 생각만 해야 하는 건 아닌지. 하지만 저는 세상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을 마음껏 탐구하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학문으로서 더 정제된 방법으로 이 세계를 궁금해할 수 있고, 그렇게 찾아낸 저 나름의 의미를 또한 학문으로서 정제된 말로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를 수 있다고. 그래서 제가 공부를 하는 거라고 믿고 있을 뿐입니다. 어쩌면 웅대한 꿈과 발자취를 위한 학문이기보다는 개인의 작은 삶을 위한 것으로서의 학문이지요.

 

뭐야뭐야 나도 알려줘 알고 싶어! (이미지 출처: pixabay.com; AdinaVoicu)

 

처음 공부를 더 하겠다는 결심을 했던 순간을 생각해 봅니다. Microtubule 위를 뚜벅뚜벅 걷고 있는 kinesin이 좋았습니다. 아직 구조가 밝혀지지 않은 생체 분자의 구조를 저도 하나쯤은 밝혀내고 싶었고, 이런 모양으로 생겼으니 자연스럽게 저런 기능을 할 수 있는 거라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제가 날마다 연구실에서 RNA의 구조를 들여다보는 것처럼, 누군가 저를 지켜보는 사람이 있다면 그의 눈에 저는 학문의 길을 꿋꿋하게 뚜벅뚜벅 걸어가는 모습으로 보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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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C(ibric.org) Bio통신원(미윤(필명)) 등록일2024.07.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