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실험실이 좋습니다] 내가 먼저 건강해야 얘네도 건강하지 않을까
대학원생이 되면 이상하게도 다들 병을 한 두 개씩 가지게 되는 것 같았다. 처음에 나는 아프지 않을 거라는 자신감이 있었다. 대학원에 진학하기 전까지 비염을 제외하면 건강에 큰 염려가 없었었다. 하지만,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체력이 떨어지는 건 불가항력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회사는 업무시간이 끝나면 업무와 관련된 일을 잠시 머릿속에서 떠나보낼 수 있었지만, 대학원은 아니었다. 출퇴근 시간이 정해져 있었음에도 퇴근 시간 이후 마음 놓고 퇴근할 수도 없었고, 저녁 늦게까지 있으면서 하루 두 끼 이상은 바깥음식을 섭취하게 되었으며 당이 떨어지면 간식을 찾아 헤맸다. 게다가 하필 내가 대학원생일 때는 코로나로 인해 많은 것이 제약되던 시절의 막바지였다. 석사 1년 차까지만 해도 헬스장에서 마스크를 쓰고 운동을 할 수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니 내 몸이 얼마나 중심을 빨리 잃었을지는, 뻔한 결과였다.
대학원생으로 산다는 건, 멀쩡히 건강한 사람도 스스로 엄격하게 관리하지 않으면 건강을 잃게 되는 생활이라고 생각했다. 입학 전 회사를 다닐 땐, 나도 MZ 세대인지라 야근보다 칼퇴를 좋아했고, 칼퇴를 위해 업무 시간 내에 업무를 모두 끝내는 게 맞다는 생각을 했었다. 대학원은 조금 달랐다. 우선 내가 오늘 할 일이 계획된 업무시간 내에 끝나지 않았다. 실험을 하다 보면 시간은 정말 잘 흘러갔다. 기기 앞에서 막히는 부분이 있어서, 잠시 기다리는 시간이 있어서.. 혹은 실수를 해서 다시 실수한 부분을 수행하다 보면 몇 시간이고 지나있는 일이 다반사였다. 정신을 차려보면 저녁을 먹을 시간, 혹은 이미 지하철 막차를 타기 위해 퇴근해야 하는 시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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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12시간마다 샘플링해야 했던 시기의 어느 새벽 4시, 이쯤 되면 집중도 안되고 유튜브를 틀고 새벽을 보내기도 했다.
카톡을 보면 당시 유럽 여행 중이던 친구와 시차가 거의 맞아떨어질 정도였다. 이맘때 가장 바이오리듬이 많이 무너졌던 것 같다.
우리는 우스갯소리로 실험실은 시간과 정신의 방이라는 이야기를 했다. 가장 많이 언급되었던 곳은 현미경 앞이었다. 현미경 앞에서 세포 수를 계수하다 보면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시간이 정말 잘 흘러갔다. 출근하자마자 현미경 앞에 앉으면 점심을 먹으러 가자는 전화가 올 정도였으니. 그렇다 보니 자연스럽게 거북목과 어깨결림과 같은 고통이 동반되었다. 눈이 건조해지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했다. 사진 속 작은 미생물을 카운팅 하면서 계속 모니터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으며, 그 장소는 하필 여러 기기들이 돌아가는 분석실이었기에 눈이 얼마나 빨리 건조해졌는지. 현미경을 사용했던 연구원이라면 대부분 공감할 것이다.
다음으로 가장 흔한 건 감기몸살과 장염이었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어느 한구석이 찌뿌둥하다 싶으면, 그날 점심이 지날 때쯤이면 바로 몸살기운이 돌곤 했다. 콧물은 달고 살았으며, 조용한 연구실에서 코를 풀기 위해 복도로 나가는 것도 다반사였다. 그나마 가벼운 감기 증세로 하루이틀 만에 괜찮아진다면 다행이었지만, 같은 연구실에는 유독 장염으로 고생하는 사람이 많았다. 건강한 위장을 타고난 덕에 장염을 일평생 앓아본 적이 없던 나였지만, 옆에서 지켜보면서 장염 환자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간접적으로나마 느낄 수 있었다. 퇴근 좀 하시라고 옆에서 거들어도 퇴근을 하지 않고 실시간으로 수분과 영혼이 쪽쪽 빨려나가는 동료를 곁에서 보는 건 조금 힘들었다.
더불어 코로나의 영향까지 매우 심각했었다. 한 명이 걸리면 연구실 전체가 격리를 하던 때도 있었는데 자취를 하던 다른 친구들과 다르게 가족들과 같이 사는 집에서 격리를 하는 건 정말 어려웠다. 경로가 겹치는 사람들도 격리를 하던 시기를 지나서 코로나에 걸렸다. 좁은 방에서 격리하며 줌으로 랩미팅에 참여했었는데, 내게 질문은 없냐는 교수님의 말에 마이크를 켜고 한마디 했으나, 바로 돌아온 교수님의 아.. 하는 탄식이 아직도 기억난다. 코로나의 제일 큰 문제는 실험실로 출근을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건 실험을 하고 논문을 써야 하는 이공계열 대학원생들에게 치명적인 일이었다. 특히나 미생물을 키웠던 연구실로 시드를 살리기 위해 못해도 1-2주에 한 번은 무조건 출근을 해야 했고, 본인의 연구를 위해서는 매일 비슷한 시간에 출근해서 실험을 해야 했던지라 우리에게는 더더욱 치명적인 시간들을 보내야 했다.
그즈음 피검사를 받을 일이 있었는데, 비타민 D 결핍과 철분 부족이라는 상태를 통보받았다. 아침에 연구실에 들어가 해가 지면 돌아오는 생활을 반복했었으니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비타민 D 주사도 실비처리가 된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대학원생이라는 말에 의사선생님께서 주사를 추천하며 4개월에 한 번씩만 맞자고 하셨다. 비타민 D가 과연 얼마나 도움이 될지, 하며 반신반의로 맞았으나 생각보다 비타민 D는 굉장했다. 아침에 일어나는 게 좀 더 힘들지 않아 졌고, 무기력한 점이 조금 개선되었다. 그것만으로도 훨씬 몸이 가볍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햇빛을 충전하기 위한 잠깐의 산책이 소중하고 중요하다는 걸 다시금 깨달을 수 있었다. 더불어 빛을 주며 키우는 내 새끼들보다 내가 더 광합성이 부족하다는 사실에 헛웃음이 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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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햇빛을 받지 못해도, 얘들은 광합성을 듬뿍하고 푸릇푸릇하게 잘 자랐다.
생명을 키우는 데는 다른 생명이 필요하다는, 부모의 마음이 이런 걸까…
이런 불규칙적인 생활과 그로 인한 자잘한 잔병치레 때문에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사람에 대한 존경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특히, 하루에 자신이 할 일을 계획하고 딱 그만큼 수행하는 사람이 가장 존경스러웠다. 졸업발표 직전, 결국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운동을 시작했다. 선택한 운동은 크로스핏이었다. 처음에는 따라가기 어려웠을지언정, 무식하게 키웠던 체력은 졸업발표라는 뒷심과 이후 연구생활을 하는데 필요한 체력의 기초가 되어주었다. 지금은 일주일에 두세번은 꼭 격한 운동을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건강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우리는 당시 우스갯소리로 키우던 미세조류를 보면서 우리가 건강해야 얘네도 잘 살아남지 않을까, 라고 이야기하곤 했다. 연구실 사람들은 하루하루, 내 건강과 연구를 위해 아주 작은 것부터라도 실천하기 위해 노력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병의 근원은 스트레스이기 때문일까, 졸업 전까지 나를 괴롭히던 한 가지 문제는 졸업하고도 1년 이상 나를 괴롭혔다. 꾸준한 운동과 규칙적으로 돌아온 바이오리듬이 몸에 적응되기까지 1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는 것이다.
우리는 삶에서 돈을 벌기 위해서거나, 혹은 다른 목표나 지향점을 위해 연구를 계속하겠지만 건강을 갉아먹으면서 이 생활을 지속한다면 딱히 연구를 계속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 결국 양면의 딜레마다. 우리는 이 양쪽의 선택에서 적당히 건강할 수 있으면서 계속해서 일할 수 있는 최적의 선택을 찾아야 한다. 그 과정이 지나고 나면 우리는, 어떤 연구자가 되어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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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C Bio통신원(김틸다(필명)) 등록 2024.10.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