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강석기의 과학카페] 좋은 약이 입에 쓴 이유

산포로 2022. 9. 20. 15:39

[강석기의 과학카페] 좋은 약이 입에 쓴 이유

 

게티이미지뱅크 제공

 

용량이 독을 만든다.
- 파라켈수스

 

한 세대 전만 해도 약국에서 약을 지어줄 때 알약을 가루로 갈아서 넣은 경우가 많았다. 그 결과 입안에 약을 털어놓고 삼킬 때까지 엄청난 쓴맛에 곤욕을 치러야 했다. 요즘에도 가끔 한약(탕약)을 먹을 때면 쓴맛에 얼굴을 찡그리게 된다. 그런데 왜 많은 약들이 이처럼 맛이 쓸까. 

 

이에 대한 답은 의외로 간단한데 천연물 유래일 경우 약 대부분이 원래는 자연에서 독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독이 들어있는 음식의 맛이 써야 모르고 입에 넣어도 삼키지 않고 바로 뱉어 죽음을 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독을 쓴맛으로 느끼게 진화한 셈이다. 다만 이 과정이 완벽하지는 못해서 독버섯처럼 맹독성임에도 쓴맛이 강하지 않아 치명적인 결과가 일어나기도 한다.

 

한편 독의 용량을 낮추다 보면 어느 순간 특정한 질병에 걸린 사람에게 약으로 작용할 수 있다. 독의 쓴맛이 워낙 강하므로 약으로 쓰는 극미량이라도 입에는 꽤 쓰다.

 

식물 마전의 씨앗인 마전자에는 쓴맛이 강한 알칼로이드 분자인 스트리크닌이 들어있다(왼쪽). 스트리키닌 분자구조(오른쪽). 위키피디아 제공

 

○ 마전자의 약효 원리 밝혀져

 

천연물 가운데 가장 쓴 것으로 알려진 스트리크닌(strychnine) 역시 용량에 따라 약이 되기도 하고 독이 되기도 한다. 마전자(馬錢子)는 식물 마전의 씨앗을 가리키는 한약재로, ‘열을 내리고 해독하며 경맥을 통하게 하는’ 약효를 지니고 있다. 마전자의 주성분이 바로 스트리크닌으로 중추 신경을 흥분시키는 작용을 한다. 그 결과 미량을 쓰면 경맥을 통하게 하는 게 아닐까. 서양의학에서도 스트리크닌은 신경장애와 근무력증에 처방됐고 한때 운동선수들이 기록향상을 위해 복용하기도 했다.

 

그런데 용량이 어느 선을 넘어서면 신경 흥분이 지나쳐 경련으로 나타나고 질식으로 죽음에 이르기도 한다. 스트리크닌의 치사량은 0.1그램에 불과하다. 역시 쓴 물질인 카페인의 치사량이 10그램(커피 100잔)인 걸 떠올리면 독성이 엄청나다. 

 

스트리크닌이 우리 몸에 독성 또는 약효를 보이는 이유는 1973년 밝혀졌다. 스트리크닌은 신경세포(뉴런)의 억제성 시냅스 전달 신호에 관여하는 글라이신수용체에 달라붙어 활성화되지 못하게 만든다. 이런 식으로 작용하는 물질을 길항제라고 부른다. 그 결과 억제성 시냅스 전달이 제대로 되지 않아 신경은 계속 흥분하며 경련과 마비가 나타난다.

 

반면 평소 억제성 시냅스 전달이 지나쳐 신경 신호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으면 신경장애나 근무력증이 생긴다. 이때 스트리크닌을 미량 복용해 글라이신수용체 활성을 떨어뜨리면 신경 활동이 정상으로 돌아온다. 

 

지난 2015년 학술지 ‘네이처’에는 사람의 글라이신수용체에 스트리크닌이 달라붙었을 때 구조가 어떻게 바뀌어 비활성 상태가 되는가를 규명한 논문이 실렸다. 글라이신수용체는 세포막에 박혀있는 단백질로 다섯 개가 하나의 단위로 작동한다. 수용체 단백질만 있을 때는 서로 가까이 배치된 상태이지만 글라이신이 달라붙으면 구조가 바뀌면서 가운데 통로가 생겨 세포 밖에 있는 염소이온이 안으로 들어오면서 억제성 시냅스 전달이 이루어진다.

 

그런데 스트리크닌이 수용체에 달라붙으면 단백질 구조가 다른 방향으로 바뀌면서 세포막에 박혀있는 부분들이 서로 더 가까워져 안정적인 구조를 이루며 염소이온이 이동할 길이 완전히 막힌다. 그 결과 억제성 시냅스 전달이 이뤄지지 않아 신경 활동이 계속된다. 그렇다면 스트리크닌은 어떻게 쓴맛을 느끼게 할까.

 

글라이신수용체는 뉴런 세포막에 박혀있는 막단백질로 그림에서 아래가 막을 관통하는 부분이고 위가 세포밖에 노출된 부분이다. 단백질 다섯 개가 상호작용해(그림에는 세 개만 묘사) 세포막을 가로지르는 통로를 만드는데, 수용체만 있을 때는 좁아 염소이온이 통과하지 못한다(가운데). 세포 밖 글라이신(agonist) 농도가 높아져 수용체에 달라붙으면 구조가 바뀌며 통로가 넓어져 염소이온이 통과해 억제성 시냅스 전달이 이뤄진다(오른쪽). 반면 스트리키닌(antagonist)이 달라붙으면 통로가 더 좁아져 염소이온이 통과할 수 없다(왼쪽). 네이처 제공
 
○ 25가지 수용체가 수천 가지 쓴맛 분자 감지

 

혀의 표면에 있는 돌기 안에는 세포 50~100개로 이뤄진 미뢰가 있다. 얼핏 보면 양파처럼 생겼지만, 사실 가는 마늘쪽 수십 개로 이뤄진 마늘 형상이다. 이들 세포의 표면에는 미각수용체 단백질이 박혀있다. 음식을 먹으면 특정 맛 분자가 미각수용체에 달라붙어 세포를 활성화시켜 신호를 뇌로 전달해 우리는 맛을 느끼게 된다.

 

2000년대 들어 기본 맛 다섯 가지에 대한 수용체 유전자가 밝혀졌는데, 사람의 경우 쓴맛수용체 유전자가 25개나 된다. 단맛수용체와 감칠맛수용체 유전자가 각각 두 개(그나마 하나는 겹침)인 것에 비하면 꽤 많다. 우리 몸에 독이 될 수 있는 물질의 종류가 워낙 많아 수용체 두세 개로는 다양한 구조를 모두 커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단맛과 감칠맛 분자와 해당 수용체의 상호작용이 일찌감치 밝혀진 것과는 달리 쓴맛은 아직 정리가 제대로 되지 않은 이유다.

 

물론 쓴맛수용체 연구도 꽤 진행돼 각각의 수용체가 담당하는 쓴맛 분자가 여럿 밝혀졌고 그 결과 흥미로운 사실이 드러났다. 쓴맛수용체 가운데 세 가지는 다양한 구조의 쓴맛 분자와 결합하는 반면 일부는 특정 쓴맛 분자하고만 결합했다. 한편 쓴맛 분자 가운데도 무려 15가지 수용체에 달라붙는 것도 있는 반면 하나의 수용체만 파트너로 삼는 경우도 있었다.

 

많은 쓴맛 분자와 작용하는 수용체는 TAS2R10과 TAS2R14, TAS2R46다. 지금까지 시험한 쓴맛 분자 가운데 TAS2R10은 29%, TAS2R14는 34%, TAS2R46은 28%와 반응했다. 이들이 감지한 쓴맛 분자를 합치면 전체 쓴맛 분자의 절반에 이른다(겹치는 게 많다). 스트리크닌은 세 개의 수용체에 달라붙는데, 이 가운데 TAS2R10과 TAS2R46이 포함돼 있다. 한편 TAS2R46은 쓴맛수용체 25가지를 대표해 널리 연구되고 있다.

 

스트리키닌이 있을 때 쓴맛수용체 TAS2R46의 구조를 보여주는 이미지다. 오른쪽 확대한 단면을 보면 움푹한 공간 아래쪽에 88번째 아미노산 트립토판(W88)의 벤젠 고리가 들어온 스트리키닌의 벤젠 고리와 상호작용하며 안정화시킴을 알 수 있다. 사이언스 제공
 
○ 쓴맛수용체 구조 최초로 밝혀

 

학술지 ‘사이언스’ 16일자에는 스트리크닌의 존재 여부에 따른 TAS2R46 구조 변화를 규명한 논문이 실렸다. 쓴맛수용체의 구조를 밝힌 최초의 결과로 지난 2017년 노벨화학상 업적인 극저온전자현미경을 이용했다. 

 

쓴맛수용체는 G단백질 연결 수용체의 한 종류다. 인간 게놈에는 G단백질 연결 수용체 유전자가 800여 개나 있는데, 미각, 후각, 시각 등 감각 정보를 비롯해 다양한 외부 정보를 감지해 신경으로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G단백질 연결 수용체 역시 세포막에 박혀있는 단백질로, 이름이 알려주듯이 세포질 쪽에 G단백질(작은 단백질 세 개로 이뤄진 복합체다)이 연결돼 있다. 평소에는 수용체와 G단백질이 느슨하게 연결돼 있지만, 외부 정보를 지닌 물질이 수용체에 달라붙으면 수용체 구조가 바뀌면서 G단백질의 하나(알파)를 꽉 붙잡는다. 그 결과 알파의 구조도 바뀌며 나머지(베타와 감마)가 떨어져 나간다. 이렇게 자유의 몸이 된 베타와 감마 복합체가 세포 내에서 신호 전달 경로를 활성화시켜 뇌로 정보를 전달한다. 

 

따라서 G단백질 연결 수용체는 G단백질 복합체가 연결된 상태에서 구조를 밝혀야 의미가 있다. 지금까지 단맛과 감칠맛수용체 등 많은 G단백질 연결 수용체의 구조가 규명됐지만 25가지나 되는 쓴맛수용체의 구조는 아직 알려진 게 없는 상태였다.

 

상하이공대를 비롯한 중국의 공동 연구팀은 수용체와 G단백질의 일부분을 살짝 바꿔 구조를 안정화시키는 기법을 써서 마침내 쓴맛 분자의 유무에 따른 구조 변화를 밝히는 데 성공했다. 단백질 구조는 아미노산으로 이루어진 사슬이 접힌 결과로, TAS2R46은 사슬이 모두 일곱 차례에 걸쳐 세포막을 관통해 박혀있다. 이 가운데 세포 밖을 향한 면이 움푹 들어가 있는데, 바로 쓴맛 분자가 들어와 결합하는 부분으로 밝혀졌다. 

 

스트리크닌이 이 공간에 들어오면 분자의 벤젠 고리 부분이 아래쪽에 놓인 88번째 아미노산인 트립토판의 벤젠 고리와 마주 보면서(파이-파이 상호작용이라고 부른다) 자리를 잡는 것으로 밝혀졌다. 여기에 스트리크닌 분자의 아민기와 수용체의 265번째 아미노산인 글루탐산의 카복시기가 이온 형태로 상호작용해(염다리라고 부른다) 더 안정화된다.

 

이렇게 쓴맛 분자가 달라붙으면 수용체의 구조가 바뀌는데, 특히 241번째 아미노산인 타이로신의 방향이 확 꺾이는 게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그 결과 G단백질의 알파 부분과 닿아있는 부분의 구조가 바뀌며 G단백질 복합체 구조가 느슨해지는 것으로 밝혀졌다. 

 

연구자들은 실험으로 밝혀진 수용체 구조를 바탕으로 TAS2R46가 반응하는 것으로 알려진 쓴맛 분자들과의 상호작용을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분석했다. 그 결과 스트리크닌처럼 벤젠 고리를 지니고 있는 분자들은 스트리크닌과 같은 방식으로 상호작용하며 배치됐고 벤젠 고리가 없는 분자들은 수용체의 88번 타이로신 및 265번 클루탐산과 다른 방식으로 상호작용하며 자리를 잡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번 결과는 쓴맛수용체 구조 이해의 출발점으로 TAS2R10과 TAS2R14처럼 여러 쓴맛 분자와 상호작용하는 수용체의 구조를 규명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반면 특정 쓴맛 분자에만 반응하는 쓴맛수용체의 까다로운 입맛은 이들 수용체의 구조가 밝혀져야만 이해가 될 것이다.

 

앞으로 입에 쓴 약을 먹게 될 때면 쓴맛수용체의 달콤한 진실을 떠올리며 쓴맛을 기꺼이 받아들여야겠다.

 

극저온전자현미경으로 밝힌 TAS2R46의 구조를 바탕으로 이 수용체가 인식하는 쓴맛 분자들과의 상호작용을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분석한 결과다. 스트리키닌과 비슷한 구조를 지닌 분자들은 상호작용 방식도 비슷하고(위) 다른 구조를 지난 분자들은 다른 방식으로 상호작용함을 알 수 있다(아래). 사이언스 제공글라이신수용체

동아사이언스 (dongascience.com) 강석기 과학칼럼니스트 (kangsukki@gmail.com) 2022.09.20 1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