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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물의 경제학에서 칼로리는 화폐다"- 허먼 폰처
굳이 설명이 필요하지 않은 당연한 일도 ‘정량적’으로 따지고 들면 이해하기 어려운 현상임을 깨닫는 경우가 가끔 있다. 필자에겐 식사량(칼로리 섭취량)과 몸무게의 관계가 그렇다. 소모량보다 덜 먹으면 몸무게가 줄고 더 먹으면 살이 찌는 건 당연한 얘기인데 무슨 소리냐 싶겠지만 한번 생각해보자.
보통 체중을 유지하고 있는 한 사무직원의 하루 평균 섭취량이 2450칼로리라고 하자. 이 사람이 식사량을 20%가량 늘려 하루에 2900칼로리를 섭취한다고 하자. 활동량은 변화가 없다면 매일 450칼로리가 남고 이게 지방으로 바뀌면 50그램이 된다. 몸무게가 한 달이면 1.5㎏, 1년이면 18㎏, 10년이면 180㎏ 더 늘어난다는 말이다. 반면 식사량을 20% 가까이 줄여 하루에 2000칼로리를 섭취하고 활동량은 변화가 없다면 반대로 살이 빠지고 1년이 넘으면 극단적인 저체중으로 생명이 위협받을 것이다.
물론 현실에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더 먹으면 살이 찌고 덜 먹으면 빠지는 방향은 맞지만 이처럼 계속해서 ‘선형적으로’ 비례해서 몸무게가 변화하는 건 아니다. 처음 한두 달은 그럴지 모르지만, 활동량에 변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식사량 차이가 몸무게에 미치는 영향이 줄어든다. 왜 그럴까.
5년 전 우연히 미국 과학잡지 ‘사이언티픽 아메리칸’에 실린 ‘운동 역설’이라는 제목의 글을 읽고 이 의문이 상당히 풀렸다. 미국 헌터대의 인류학자 허먼 폰처 교수가 기고한 글로, 운동을 해서 살을 빼기 어려운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간단히 말하면 활동량을 늘려 칼로리 소모가 많아지면 몸은 생리를 바꿔 다른데 쓸 칼로리를 줄여 수지를 맞춘다. 이런 조정이 일어나기 전까지만 운동의 다이어트 효과가 있다는 말이다. (운동 역설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과학카페 ‘운동만 해서는 절대 살 못 뺀다!’ 참조)
국제학술지 ‘사이언스’는 이달 18일 폰처 교수(2018년 듀크대로 옮겼다)를 주인공으로 한 장문의 인터뷰성 기사를 실었다. 옛날 생각이 나 읽어보니 이분 역시 처음에는 활동량과 칼로리 소모량이 비례한다는 전제 아래 실험을 하다 뜻밖의 발견을 한 것이다. 그 뒤 칼로리 섭취량이 몸무게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 몸이 소비량을 조절하는 생리 메커니즘을 여러 측면에서 연구하고 있는데, 여전히 많은 부분이 미스터리라고 한다.
예를 들어 스트레스가 칼로리 소모량에 미치는 영향을 알아보는 실험을 보자. “1022에서 13씩 빼서 0까지 세라”는 요청을 받은 피험자(대학생)가 “1009, 997”이라고 대답한다. 그 순간 “틀렸으니(996이다) 처음부터 다시”라는 말을 듣고 피험자는 다시 시작한다. 이런 식으로 몇 분 시달리다 보면 스트레스가 올라갈 수밖에 없다.
물론 연구자들의 목적인 스트레스 수치를 측정하는 게 아니라 대사량이다. 놀랍게도 이 테스트 과정에서 분당 칼로리 소모량이 40%나 늘었다. 웬만한 운동보다 큰 변화다. 면담 실험에서 “원하는 직업이 뭐냐?”“졸업 뒤 뭘 할 거냐?” 같은 교수의 질문에 답하는 학생 역시 스트레스로 분당 칼로리 소비량이 30% 늘었다.
정신적 스트레스가 어떻게 이처럼 엄청난 칼로리를 소모하게 만드는가는 아직 잘 모른다. 다만 정적인 생활을 하는 현대인들의 대사량이 하루 24시간 내내 기초대사량에 가까울 거라는 기존 상식은 전혀 사실이 아닌 것은 확실하다. 스트레스를 푸는 가장 좋은 방법 가운데 하나가 운동이라는 것도 에너지의 관점에서 말이 된다. 즉 운동에 들어가는 칼로리를 상쇄하기 위해 스트레스 반응이 약화되는 쪽으로 재조정된 결과라고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속적으로 과식을 해도 이에 비례해 살이 찌지는 않는 현상은 뜻밖에도 면역의 관점에서 설명할 수 있다. 즉 지방조직이 늘어나면서 각종 염증 유발 물질이 점점 많이 분비되고 그 결과 우리 몸은 만성 염증 상태가 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칼로리가 꽤 소모된다고 한다. ‘그나마 다행이네’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안타깝게도 만성 염증은 당뇨병이나 암 같은 각종 대사질환 위험성을 높이는 요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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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관련해 ‘사이언스’ 11일자에 흥미로운 연구 결과가 실렸다. 약한 수준의 칼로리 제한, 즉 소식이 건강수명을 늘리는 데는 면역계도 관련돼 있다는 발견이다. 지금까지는 미토콘드리아 세포호흡 변화나 자원 재활용(오토파지) 같은 대사의 관점에서 칼로리 제한의 효과를 설명해왔다.
미국 예일대 연구자들은 2년 동안 일상생활에서 칼로리 제한을 실천한 그룹의 다양한 생리 지표를 분석했다. 이들의 칼로리 섭취량은 평소대로 먹은 비교 그룹보다 14% 적어 흔히 소식이라고 부르는 수준이었다. 참고로 전형적인 칼로리 제한 동물실험은 25~40%를 줄인 양이다.
소식 그룹은 물론 몸무게가 좀 줄었지만 가장 놀라운 변화 가운데 하나가 흉선(가슴샘)이 약간 커졌다는 점이다. 가슴샘은 면역계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조직으로, 백혈구의 하나인 T세포가 성숙하는 곳이다(T는 가슴샘(thymus)을 뜻한다). 가슴샘은 중년 이후 줄어들기 시작하고 이에 따라 면역력도 천천히 떨어진다.
아울러 소식을 하면 몸의 전반적인 염증 수치가 떨어졌다. 소식에 따른 혈액 내 유전자 발현 패턴 변화를 조사한 결과 PLA2G7 유전자의 발현량이 줄어든 게 두드러졌다. PLA2G7 단백질은 나쁜 콜레스테롤이라고 불리는 저밀도지방단백질(LDL)에 달라붙어 있는 효소로, 표적 단백질의 아세틸기를 떼어내 염증 신호를 증폭 등 여러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연구자들은 게놈편집기술로 PLA2G7 유전자가 고장난 생쥐를 만들었다. 놀랍게도 이들은 고지방먹이를 마음껏 먹는 조건에서 대조군에 비해 살이 찌는 정도가 덜했고 염증 유발 물질의 수치도 낮았다. 추가 연구 결과 PLA2G7는 가슴샘과 지방조직, 대식세포(만성 염증 관여)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드러났다. 칼로리 섭취량과 면역 반응 사이의 핵심 고리 역할을 한다는 말이다.
나이(고령), 기저질환과 함께 코로나19 중증화 위험 요인 가운데 하나가 비만이다. 재작년 영국 보리스 존슨 총리가 코로나에 걸려 죽다 살아난 뒤 “살을 빼야겠다”고 말했다는 뉴스가 나오기도 했다. 얼핏 생각하면 살이 찐 게 중증화와 무슨 상관이 있을까 싶지만, 지속적인 칼로리 과잉 섭취에 대응해 몸의 생리가 재조정되는 과정에서 면역계가 과도한 염증 반응을 일으키게 바뀐 결과다.
의약품을 개발하는 과학자들에게 이번 연구는 칼로리 제한 효과를 모방하는 약물에 대한 아이디어를 줬다. PLA2G7의 활성을 효과적으로 억제하는 약물을 만들면 맘껏 먹으면서도 소식을 한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럴 수도 있지만 이런 약물이 나오더라도 여러 부작용이 따를 가능성이 커 큰 기대는 하지 않는 게 좋다. 물론 소식 습관이 건강수명을 늘리는데 얼마나 효과적인 방법인가에 대한 설득력을 높여줬다는 것만으로도 이번 연구의 가치는 충분하다.
※ 필자소개
강석기 과학칼럼니스트 (kangsukki@gmail.com). LG생활건강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했으며, 2000년부터 2012년까지 동아사이언스에서 기자로 일했다. 2012년 9월부터 프리랜서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직접 쓴 책으로 《강석기의 과학카페》(1~7권),《생명과학의 기원을 찾아서》가 있다. 번역서로는 《반물질》, 《가슴이야기》, 《프루프: 술의 과학》을 썼다.
동아사이언스 (dongascience.com) 2022.02.22 14:35